2022년 장서각 온라인 특별전 ‘숙종과 그의 시대’ 개최
2022년 장서각 온라인 특별전 ‘숙종과 그의 시대’ 개최
  • 전시일정 2022-12-07 ~ 상설
  • 전시장소 온라인
  • 문의 031-730-8820
전시소개

숙종과 그의 시대

 ∘ 전시기간: 2022. 12. 07. ~ 상설
 ∘ 사이트주소: ejsg.aks.ac.kr
 ∘ 전시소개: 특별전 ‘숙종과 그의 시대’는 그동안 영조와 정조에게 가려져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숙종의 다양한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마련되었다. 『대학』에서 강조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차용하여, 국왕 숙종을 개인, 가정, 왕실, 조정, 국가의 측면으로 확장하여 총 4부로 구성하였다.

                                                                                                                                                                            

 

Ⅰ. ‘일가(一家)의 일원(一員), 숙종’

숙종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숙종 자신, 현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외아들, 3명의 정비와 6명의 후궁의 남편, 경종‧영조‧연령군(延齡君)의 아버지라는 한 집안의 일원으로서 숙종 개인의 탄생부터 왕가의 일원으로서 그 위치를 살펴보았다.

 

 

존숭도감의궤尊崇都監儀軌

1713년(숙종 39)|2책|필사본|44.0×33.2cm|K2-2835

  

1713년 3월 9일, 숙종의 즉위 40년을 맞이하여 숙종과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에게 존호를 올린 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의궤이다. 숙종에게 올린 존호는 ‘의(義)를 드러내고 윤리를 밝힌 성인(聖人)과 같이 영명한 군주’라는 뜻으로, 신하들이 숙종을 ‘군사(君師)’로 인정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종대왕선원유부록顯宗大王璿源類附錄
 1676년(숙종 2)|1책|필사본|39.4×26.6cm|K2-1536

     

현종의 선원록(璿源錄)과 명성왕후 소생 3녀를 기록한 유부록(類附錄)을 합친 왕실 보첩이다. 「현종대왕선원록」에는 현종과 직계 후사인 숙종이 ‘일사(一嗣)’로 기록되어 있으며, 「현종대왕유부록」에는 명성왕후의 소생인 명선공주(明善公主)‧명혜공주(明惠公主)‧명안공주(明安公主)의 이름과 생년을 수록했다. 현종의 비와 자녀를 기록한 보첩으로, 현종이 승하하면서 자녀들의 인적 사항을 마지막으로 정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희빈상장등록張禧嬪喪葬謄錄
1723년(경종 3)|1책|필사본|39.5×26.0cm|K2-3006

희빈 장씨의 상장(喪葬), 천장(遷葬), 추보(追報) 의례와 관련된 문서를 정리한 등록이다. 상장은 1701년 희빈 장씨의 자진(自盡) 후 상례 진행 과정을 기록하였으며, 천장은 장씨의 묘소를 광주(廣州) 진해촌(鎭海村)으로 옮기는 절차가 수록되어 있다. 추보는 1722년 경종이 희빈 장씨를 추보하여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張氏)’로 삼고 새로 대빈묘(大嬪廟)를 건립한 후 친림하여 전배례(展拜禮)를 행하는 일련의 과정을 담고 있다.

 
 

당대선원록當代璿源錄

1713년(숙종 39)|1책|필사본|58.8×42.2cm|K2-925

 

1713년 종부시에서 숙종 자녀의 출생, 혼인, 봉작, 죽음 등을 기록한 왕실 보첩이다. 숙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존호를 올리고, 『선원계보기략』에 이를 반영하여 증보하는 과정에서 제작된 보첩으로 추정된다.

 

 

Ⅱ. ‘왕가(王家)의 왕손(王孫), 숙종’

숙종이 원자이자 적장자로서의 권위를 바탕으로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국왕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에 숙종이 자신의 정통성을 왕실 운영의 정당성으로 환치하여, 왕계통을 바로잡고, 억울한 왕실 인물을 복위시킨 후 이를 반영한 계보를 간행·반포함으로써 왕권은 물론 왕실의 권위를 크게 향상시킨 업적을 정리하였다.

 

 

1683년 태조 가상시호 망단자太祖加上諡號望單
1683년(숙종 9)|1장|필사본|49.8×71.2cm|RD00522

 

1683년 4월 태조에게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는 가상시호를 올린 망단자이다. 숙종은 기존 태조의 시호 자수가 후대 왕보다 적고, 위화도회군과 같은 공업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해 시호를 가상함으로써, 태조에게 춘추대의(春秋大義)의 명분을 부여하고 창업의 사적을 재평가하였다.

 

 

[단종대왕정순왕후복위]부묘도감의궤[端宗大王定順王后]祔廟都監儀軌

1698년(숙종 24)|1책|필사본|43.7×34.3cm|K2-2223

1698년 단종과 정순왕후를 복위시키면서 신주를 영녕전(永寧殿)에 부묘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조선의 제6대 국왕인 단종은 신하들이 도모한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사사된 인물이다.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단종의 복위는 숙종에 의해 단행되었는데, 1691년에 사육신(死六臣)이 복관(復官)되었던 것이 주요 명분이 되었다. 숙종은 군신의리(君臣義理)의 표상인 단종과 사육신을 부각시키고 이들의 지위를 회복시킴으로써 붕당정치에서 탕평정치로 국정 운영 체제를 전환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방하였다.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1679년(숙종 5)|2권 1책|목판본|35.8×23.9cm|K2-966

1679년 11월 종부시(宗簿寺)에서 편찬한 왕실 보첩이다. 왕실 족보는 국왕과의 친소·적서·남녀에 따라 『선원록(璿源錄)』‧『종친록(宗親錄)』‧『유부록(類附錄)』으로 나뉘어 작성되었는데, 세대가 오래되면서 왕실 구성원이 방만해지고 구성원의 계통은 물론 이름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숙종은 세 계보를 하나로 통일한 이간(李偘)의 『선원보략(璿源譜略)』 체제를 기반으로 하되, 열성의 승하전명(昇遐殿名)·왕후 탄강(誕降) 및 책봉 연월일·누락된 자손들 등을 보완하여 『선원계보기략』을 간행하게 하였다.

 

 

Ⅲ. ‘조정(朝廷)의 군사(君師), 숙종’

절대 군주로 즉위한 숙종이 환국(換局)을 통해 국정 운영의 파트너를 자의적으로 교체하고, 붕당 간 논쟁의 시비를 명변하여 탕평정치를 추구하였으며, 국왕이 대명의리(對明義理)와 같은 시대적 담론을 주도함으로써 조정 신료들의 국왕[君]이자 스승[師]이 되고자 했던 궤적을 추적하였다.

 

 

1701년 이항(李杭)의 포금유서布衾遺書

이항|1701년(숙종 27)|1점|삼베에 묵서|29.0×110.4cm|공주 전주이씨 숭선군파 종가

1701년 11월 8일 새벽, 동평군(東平君) 이항이 옥중에서 삼베에 쓴 유서이다. 그는 기사환국 당시 희빈 장씨와의 친분으로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1701년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신사옥사(辛巳獄事)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이항은 사사되기 직전 삼베에 자신의 묘지명, 자식들을 향한 유언, 친인척에게의 부탁, 홍세태(洪世泰) 형제에게 장례 및 뒤처리를 부탁하는 글을 남겼다. 본 자료는 그동안 잘 밝혀지지 않았던 숙종 대 신사옥사의 일면을 확인해줄 수 있다.

 

 

전록통고典錄通考

1707년(숙종 33)|14권 7책|금속활자본(무신자혼보자판)|31.0×21.5cm|K2-2092

1707년 『경국대전』, 『대전속록』, 『대전후속록』, 『수교집록(受敎輯錄)』의 조문을 종합 정리한 법전이다. 조선은 전기에 『경국대전』‧『대전속록』‧『대전후속록』이라는 법령집을 편찬하였으나, 세대가 누적됨에 따라 법제 사이의 위상이 모호해졌고, 실제 법적 적용에 있어 모순을 일으키는 법령들도 존재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숙종 대에는 150여 년간 축적된 수교를 정리해 『수교집록』을 편찬한 후, 기존의 법전을 대상으로 조문(條文)을 분류하고 통합해 『전록통고』라는 하나의 법전으로 만들며 법제 정비 사업을 마무리하였다.

 

 

 

대보단어제갱화첩大報壇御製和帖

1705년(숙종 31) 이후|1책|필사본|40.3×28.1cm|PD2B-27

1705년 3월 9일, 숙종이 대보단에 제사 지내고 감회를 적은 시와 신하들의 응제시(應製詩)를 수록한 첩(帖)이다. 대보단은 임진왜란 당시 구원병을 파견한 명나라 만력제(萬曆帝)를 향사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제사 당일 숙종은 단(壇)에서 제사를 거행한 뒤 어제시를 내리고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리도록 하였다. 갱화첩은 ‘어제어필(御製御筆)’로 표기된 숙종의 시와 15명의 신하들이 올린 화답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당대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Ⅳ. ‘국가(國家)의 군주(君主), 숙종’

청과 일본과의 대외관계를 해결하고, 백성의 고된 삶을 위무하는 군주로서 숙종의 면모에 역점을 두었다. 숙종은 외교를 통해 오늘날 한반도 영역의 토대를 구축하고, 5군영 체제의 완비와 수도권 방어정책의 시행으로 국가적 안위를 담보하였으며, 다양한 구휼 방안을 추진해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로써 숙종 연간에 양대 전란 후 국가의 기강을 회복하여 조선 후기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음을 조명하였다. 

 

 

북한지北漢誌

성능|1745년(영조 21)|1책|필사본|34.7×20.5cm|K2-4507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 축조에 참여했던 승려 성능(聖能)이 산성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지지(地誌)의 형태로 간행한 책이다. 북한산성은 남한산성과 더불어 조선 후기 수도권 방어체제에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다. 그리고 『북한지』는 고대 이래 산성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숙종~영조 대의 경리청(經理廳)‧총융청의 운영과 도성 방어체계를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해서암행일기海西暗行日記

박만정|1699년(숙종 22)|1책|영인본|29.9×25.5cm|K2-4982

황해도 암행어사 박만정(朴萬鼎)이 기록한 공무 일기이다. 황해도 수령의 감찰과 백성의 진휼이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박만정은 신분을 숨기며 민가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관아에서 불법 문서를 확보하였다. 그는 귀경 후 염찰 과정에서 획득한 공식적인 정보를 선택하여 서계와 별단으로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관리에 대한 상벌을 시행하였다. 본 사료는 17세기 말 황해도 지역민의 생활상과 지방 수령 행정의 실태는 물론 중앙 정부의 지방관 감찰 및 지역민의 불만 해소 방안과 구휼책 등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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