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의 향기

여성의 한계를 넘어선 사주당이씨(師朱堂李氏)

박용만 사진
박용만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책임연구원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 노릇하는 것이 어찌 여기에 있겠는가?[人爲人 在玆乎]


어린 여자아이가 문득 하던 길쌈을 멈추고 한 말이다. 여섯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 함의(含意)가 지극히 원대하다. 이 어린아이가 「태교신기」라는 최초의 태교서를 저술한 사주당이씨(師朱堂李氏, 1739~1821)이다. 이 시기 조선은 남녀의 역할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던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선언은 엄청난 자의식이었다. 여자라고 하여 학문을 익히지 않고 바느질과 길쌈으로 한 평생을 사는 것은 참다운 사람 구실이 아니라는 것이니, 사주당의 깨어있는 의식, 곧 자각의 일면을 보여주는 선언이라고 할 것이다.


삶의 방향을 정한 사주당은 낮에는 길쌈과 바느질을 하고 밤에는 등불을 빌려 한글로 언해된 책들을 보며 1년 만에 한문의 문리가 통하였다. 이어 본격적으로 유가의 경전을 섭렵하여 시집가기도 전에 이미 집안 남자들이 따라올 수 없을 경지에 이르렀다. 송명흠(宋明欽)과 같은 당시 큰 학자도 그녀의 학문을 높이 평가할 정도였다. 이때 자신의 당호(堂號)를 ‘사주당(師朱堂)’으로 삼아 주자(朱子)를 스승 삼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니 학문적 목표의식이 너무도 분명하였다.


사주당이씨가 태어나 살던 청주 지동의 현재 모습

사주당이씨가 태어나 살던 청주 지동의 현재 모습

충청도 청주에서 태어난 사주당은 부친상으로 인해 25세라는 늦은 나이에 경기도 용인의 유한규(柳漢奎)에게 시집갔다. 남편 유한규는 소론의 후예로 양명학을 따라 사주당과는 학문적 결이 달랐지만 밤이면 성리학을 토론하며 서로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또 아들 하나 딸 셋을 낳아 기르면서 그 경험을 󰡔태교신기󰡕로 남겼는데, 그 아들이 바로 조선후기 실학자인 유희(柳僖)이다.


사주당은 여타 조선시대 여성지식인과 구별되는 점들이 발견된다.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각(自覺)과 자득(自得)을 통한 학문적 성취는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남편을 공경하며 자녀를 교육하여 성장시킨 것은 물론 심지어 장사꾼조차 그 깨끗함을 믿었으며 경제활동에도 능했던 점은 사주당의 성품과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사주당의 삶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이러한 여러 일들이 의도하여 매달린 결과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에서 성취되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行과 德이란 것은 반드시 우둑하고 깜짝 놀라게 할 필요는 없으니, 오직 평소의 일상에서 사람이 하늘에 떳떳하면 곧 實은 그 가운데 있게 된다


유한규와 사주당이씨의 무덤

유한규와 사주당이씨의 무덤

이 글은 이용휴(李用休)가 파평윤씨부인의 묘지명에서 쓴 말이다. 한 사람의 덕행이 반드시 탁월하거나 깜짝 놀라게 할 필요는 없다. 일상의 삶에서 하늘에 떳떳하면 삶과 행적의 실(實)은 자연스럽게 그 속에 녹아있다는 것이다. 사주당의 생애는 화려하지 않으면서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도리를 다하였으며 그 자신을 남이 알아주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여성의 자존의식을 내세우기보다 자신의 현실에 충실하며 열심히 살아간 모습, 고질병을 앓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지식인의 모습. 이 모습을 신작(申綽)은 ‘고여사(古女士)’라고 칭송하였다.

pym1204@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