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중국 조선족 민족교육, 그 100년의 궤적과 현재적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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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량
한국학지식정보센터 백과사전편찬실 책임연구원

중국 조선족과의 조우(遭遇)

2007년, 우연히 중국 조선족 생활사 연구팀에 합류했다. 그 때 중국 길림성 장춘(長春)에 사시는 조선족 노인 한 분을 만났다.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비범한 기개가 느껴지는 분이셨다. 인터뷰 도중 그 분은 모교인 조선족 학교 동창회 명부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셨다. 얼마 후 열리는 개교 90주년 기념식 소식을 한국에 살고 있는 동창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하셨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했지만,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본교 졸업생 4명과 만날 수 있었다. 오랜 시간과 국경을 뛰어넘어 이어지는 인연을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웠다. 중국 조선족의 교육과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졌다.


근대, 국적 있는 교육의 탄생

근대 이후 교육의 기획자는 국가였다. 국민국가의 형성과 확장이 근대 정치 동학의 기제로 등장한 후, 교육은 국가 구성원의 소속감과 일체감을 구성하는 주요수단이 었다. 교육에 국적이 부여되었던 것이다. 초국가적 이주민의 존재는 이러한 근대 교육 체제에 새로운 문제를 던져주었다. 이주민 교육은 교육의 출발지 국가와 정착지 국가 간 갈등을 야기하였다. 중국의 조선족 교육이 바로 그러했다.

조선족은 중국 소수민족 중에서 유일한 이주민이다. 그들은 대체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 만주(중국의 동북3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로 이주했다. 가난, 독립운동, 일본의 조선인 이주정책 등이 그 이유였다. 재만(在滿)조선인들은 대한제국의 국민으로서 신문명 수용과 조선의 자강을 목표로 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만주는 중국 땅이다. 만주에 설립된 모든 교육기관은 중국 지방당국의 관리 하에 있었다. 더욱이 러일 전쟁(1904년) 승리 이후 일본의 중국 침략이 노골화되자 중국 정부는 조선인의 배후세력으로 일본을 규정하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인 동화교육을 꾀하였다. 중국 정부는 조선인 자녀를 중국 관립학교에 수용하거나 조선인 학교를 중국 학제 하에서 관리하고자 하였다. 반면에 조선과 만주 침략을 시작한 일본은 재만조선인에게 식민주의 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은 재만조선인의 교육을 두고 조선의 민족주의 세력 또는 중국 측과 대립하였다. 부르디외가 주장하듯“교육은 권력 역학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재만조선인 민족교육을 둘러싼 균열은 1931년 만주국 수립 이후 일본의 제국주의 교육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조선인의 민족의식은 꾸준히 각성되었고, 조선인 민족교육은 중국 땅에 뿌리를 내렸다.


중국 조선족 민족교육의 역사를 찾아서

중국 길림성 장춘시 관성구 조선족 소학교 교문

중국 길림성 장춘시 관성구 조선족 소학교 교문

필자는 중국 조선족 민족교육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중국에 산재(散在)한 조선족 학교들을 방문했다. 먼저 개교 90주년을 맞이하는 그 장춘 소재 학교에 갔다. 교문 양 옆에는 ‘관성구 조선족 소학교’라는 한글과 중국어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교정에 들어서니 운동장에서 어린 학생들이 한국어로 재잘거리고 있었다.

이후 길림성 연길시 중앙소학교, 흑룡강성 오상시 민락중심소학교를 방문했다. 세 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되어 최근까지 조선족 학교로서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조선족 학교이다.

이 학교들은 지역 위치에 따라 일제강점기 상이한 역사적 경험을 지니게 되었다. 우선, 세 학교의 설립 주체가 달랐다. 장춘시 관성구 조선족 소학교는 장춘에 조선인들이 조금씩 증가하게 되자 조선인 민회가 1922년에 설립한 장춘 최초의 조선인 학교이다. 반면, 연길시 중앙소학교는 조선총독부가 재만조선인 친일교육을 위해 1915년에 설립했다. 이 학교는 만주 최초의 근대적 민족사학 서전서숙(瑞甸書塾)이 재정난과 일본의 공작으로 해산된 후, 일본이 그 자리에 설립한 간도보통학교의 분교였다. 더불어 오상시 민락조선족향중심소학교는 일본의 만주개발정책에 따라 만주로 조선인들이 대거 이주하자. 1939년 이들을 대상으로 한 조선인 농업회사 만몽산업주식회사의 조선인 농장 교육계가 설립하였다.

중국 흑룡강성 오상시 민락조선족향 수전(水田)의 모습

중국 흑룡강성 오상시 민락조선족향 수전(水田)의 모습

다음으로, 세 학교의 운영 주체가 다르게 변화되었다. 장춘시 관성구 조선족 소학교는 조선총독부 관할 하에 조선인 민회에서 운영하다가 1933년부터 만철에서 운영하였고, 1937년부터는 일본 관동군 산하 장춘 일본대사관 교무부 관할 하에 학교조합에서 운영하였다. 반면, 연길시 중앙소학교는 조선총독부에서 운영하다가 만주국 정부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오상시 민락조선족향 중심소학교는 조선인 농업회사 만몽산업주식회사의 오상농장 교육계가 운영하다가 만주국 정부가 운영하였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만주국은 무너지고 조선인 민족교육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1949년 중국 공산화 이후 조선인은 중국 공민인 조선족이 되었고 조선인 학교들은 사회주의적 인간 형성이라는 전제 하에 소수민족 언어와 교재로 수업하는 조선족 민족교육 기관으로 운영되었다. 조선족의 민족교육 지속에 대한 열망과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교육 정책 간에 타협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중국 조선족 민족교육의 최근 모습들

현재 세 학교의 상황은 상이하다. 관성구 조선족 소학교가 위치한 장춘은 1932년 옛 만주국의 수도로 정해지면서 급속하게 도시화된 현(現) 길림성 성도(省都)이며, 지역민 대다수가 한족으로 구성된 조선족 산거(散居)지구이다. 장춘의 조선족들은 한족 사회의 소수민족으로서 조선족의 역사와 문화에 커다란 애착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뚜렷한 민족적 연대의식을 지닌 채 조선족 학교의 운영에 협조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이 학교는 장춘의 조선족들의 관심과 지지 속에서 유지되고 있다.

중국 길림성 장춘시 관성구 조선족 소학교 본관 게시판

중국 길림성 장춘시 관성구 조선족 소학교 본관 게시판

중국 길림성 연길시 중앙소학교 본관 전경

중국 길림성 연길시 중앙소학교 본관 전경

이에 반해 길림성 연길시 중앙소학교는 중국 최대 조선족 집거(集居)지구에 위치한다. 연길은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한 여러 도시 중 조선족들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연길의 조선족들은 어린 시절부터 특별히 조선족이라는 민족적 각성 없이 조선족 문화를 습득해 왔으며, 자연스럽게 조선족 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 때문에 연길 중심지에 위치한 본교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대표적 조선족 학교라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부터는 한국 소재 초등학교와 활발한 교류활동을 펼치며 성장하고 있다.

흑룡강성 오상시 민락조선족향 민락중심소학교는 앞의 두 학교와 달리 궁벽한 농촌지역에 위치해 있다.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동향 출신의 조선인들이 모여 조선인 농장을 이루면서 설립된 본교는 농장의 조선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였다.

이 농장의 조선족들은 그 동안 전형적인 벼농사 조선족향(鄕)을 이루며 살아왔다. 그들은 조선족 농촌마을 주민으로서의 친밀한 연대의식 속에서 자녀를 조선족 학교에 보내왔다. 그러나 90년대 말 이후 마을 주민들이 한국이나 중국 내 대도시로 이주하면서 본교의 학생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2011년 결국 폐교되었다.

1942년(강덕9년) 중국 흑룡강성 오상현 공립대동국민우급학교 졸업 기념

1942년(강덕9년) 중국 흑룡강성 오상현 공립대동국민우급학교 졸업 기념
사진 출처: 김도형 외, 『식민지시기 재만조선인의 삶과 기억』, 선인출판사, 2009, 195쪽.

중국 흑룡강성 오상시 민락조선족향 중심소학교 교문

중국 흑룡강성 오상시 민락조선족향 중심소학교 교문

중국 조선족 민족교육의 현재적 함의

이주와 정착은 보편적인 인간 경험이다. 우리는 이미, 항상 혼성적인 존재이다. 타자와의 교류가 없는 자아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듯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는 다양한 문화가 동시에 참여한다. 불변의 민족성 유지는 순수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조선족 문화는 타 민족 문화와 교류하면서 역사적 환경에 의해 형성되고 변화되어 온 독특한 문화이다.

교육에는 본래 국적이나 민족성이 없다. 교육은 국가나 민족을 위한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국가나 민족의 고유성을 상정하는‘민족교육’이란 현재 자신이 친밀하게 느끼는 문화에 따른 교육 내용과 방법을 향유하며 성장하는 교육이며, 이것이 민족교육의 가치이다. 민족교육이 그 외의 다른 무엇의 도구가 되는 순간 그 가치는 왜곡된다. 정치나 경제적 이익에 그 목적에 두는 순간 민족교육은 치환 가능한 대체제가 된다. 특히, 국경을 넘어선 이주민의 문화적 다양성을 허용하는 이주민 민족교육은 출발지 국가와 정착지 국가 간 순수하고 특별한 협력관계를 요구한다. 조선족 민족교육의 미래는 조선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과 중국인이라는 국가적 정체성이 결합된 조선족 문화의 향유와 이를 통한 조선족 인재로서의 능력 함양에 달려있다. 최근 통일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향후 남북 간 문화 차이로 발생할 수 있는 교육 문제에 중국 조선족 민족교육이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jeomr@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