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연 사람들

돌이켜보면 37년 동안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일들이 없어요.

일년전 정년퇴직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권미오 선생님을 만나보았다. 그녀는 1981년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인연을 맺고 인생의 절반가량을 한중연과 함께하다 2017년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퇴직하였다. 연구원의 모든 곳곳에 그녀의 손길과 열정이 묻어있듯이 그녀가 연구원의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 한중연의 역사가 그려지는 듯 했다. 밝은 미소가 한층 더욱 빛나게 느껴졌다.


권미오

오랜만에 뵙게 되었어요.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2017년 6월 30일에 정년퇴직했으니 벌써 1년이 되었네요. “백수가 과로로 사망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요즘 제가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답니다. 우선 저의 오랜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던 ‘1인 1악기’를 위해 해금 연주를 1년 정도 배우고 있는데 「월량대표아적심」, 「한강수 타령」, 「도라지 타령」 등 간단한 음악은 어설프나마 소리내기가 가능하답니다. 또 미술 전공을 살리고 싶어 미술심리상담을 병행하여 공부하면서, 지난 4월에는 그룹 전시회에 2점의 아크릴화 작품도 출품했어요.

지리산 장터목 대피소

지리산 장터목 대피소(2018. 5)

지리산 천왕봉 해돋이

지리산 천왕봉 해돋이(2018. 5)

그리고 무엇보다도 활동적인 생활을 하려고 해요. 그래서 1달에 2-3회 정도는 등산 및 국내외 여행을 꾸준히 다니고 있어요. 지난 5월에는 3일간에 걸쳐 지리산 종주도 하였답니다. 젊었을 적의 지리산 종주 경험은 있지만 60세가 넘은 지금도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으로 마음이 다소 불안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막상 시도해 보니 되더라고요. 지리산에서 바라본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과, 세석평전을 온통 수줍게 물들인 연분홍빛 산철쭉, 그리고 장터목에서의 해넘이와 천왕봉에서의 해돋이는 지금도 가슴 뿌듯한 희열로 다가옵니다. 힘든 과정 끝에 얻은 성취감에 자신감이 생기고, 행복함을 느꼈어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도 지금과 비슷한 생활이 계속 되리라 생각돼요. 지금 이 시간이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마음으로 ‘소확행’의 삶을 살고 싶어요.


입사 후 처음 발령받은 부서는 어디인가요?


권미오 사진

1981년 7월 15일에 입사하여 연찬부 연찬실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어요. 본관 1층 지금의 기획조정실 방이었지요. 담당업무는 각계각층의 고위 지도자들을 모시고 4박 5일 동안 운중관에 머물면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경제,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체험하고 논의하는 ‘지도자 간담회’였답니다.

한 달에 2번 ‘지도자 간담회’가 열리는데 상당한 정교함과 노련함이 요구되는 일이었어요. 간담회가 끝나면 어김없이 원장님(당시 고병익 원장)께서 직접 제 자리로 내려오셔서 수고했다고 격려의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이 떠오르네요. 처음 시작하는 업무가 외부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조율하면서 함께 끌어가는 일이라서 긴장감도 높았지만 제가 오랫동안 연구원 생활을 할 수 있는 초석을 단단하게 다지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요.


시간이 흘러 벌써 개원40주년이 되었네요.


생각해보니 40년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연구원의 역사는 제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네요. 40년의 세월 동안 37년을 함께했으니 연구원은 제 인생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연구원에 입사한 후 가정을 이루고,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한없이 고마운 마음이 들어요. 게다가 퇴직 후 40년 축하 멘트를 남길 수 있어 더 더욱 감사하고 행복해요. ^^

제 삶의 흔적과 체취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리고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삶의 궤적을 함께할 연구원이 앞으로 100년을 넘어 아주아주 오랫동안 발전하고 보석처럼 빛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연구원 개원 40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개원초기에는 지금의 연구원 모습과 많이 다르다고 들었어요.


개원초기 연구원 주변 모습

                                                                 개원초기 연구원 주변 모습

개원 초기 연구원에 오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었어요. 하나는 남한산성과 연구원을 오가는 하나밖에 없는 대중교통 버스를 이용하든가, 다른 하나는 성남시 수정구에 위치했던 ‘한국도로공사’ 본사와 연구원이 하루 3번 공동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방법이었죠.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수많은 논과 밭을 지나면서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연구원은 어디에 있는 거야?’, ‘제대로 잘 가고는 있는 거야?’ 등등 수많은 의심들이 뭉게구름처럼 솟아올랐다 내려가기를 반복하다보면 돌연 버스 종점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연구원의 웅장한 모습이 짠~~ 하고 나타나는 거예요. 그 당시 지금의 판교는 대부분 논과 밭이었죠. 그냥 전형적인 시골이었어요.

따뜻한 물이 공급되지 않아 추운 겨울날 화장실에서 찬물로 손을 씻어야 했던 2층의 기와지붕 건물들은 언제든 따뜻한 물이 시원스레 나오는 현대식 5층 건물로, 회색 벽돌로 쌓아올렸던 정문은 화강암으로 날개옷을 입듯 날렵하게 갈아입었죠. 불과 10여 년 전의 연구원 모습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 ‘상전벽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것 같아요. 최근 몇 년 동안 참 빠른 속도로 연구원의 외관들이 변했죠. 또 앞으로 얼마나 더 변화할 지 예측도 쉽지 않아요.

사람의 모습도 변하듯 모든 대상물은 변할 수밖에 없고, 또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보이는 외면의 아름다움과 편리함 못지않게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내면이 더 성숙해졌으면 해요. 외면의 변화는 어느 순간 참으로 속절없다고 느낄 수도 있거든요.

또한 제가 옛날을 돌아보듯이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기약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어요. 그러나 과거나 미래보다 더 값지고 가치 있는 것은 우리 모두 살아 숨 쉬는 지금, 현재, 여기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오늘을 위한 연구, 오늘을 위한 교육, 오늘을 위한 자기 성찰로 지금 현재를 알차게 결실 맺는 연구원이 되길 희망해 봅니다.


기획조정실장,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시고 원내 많은 부서에서 일하셨어요.


돌이켜보면 연구원 생활 37년 동안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고 추억에 남지 않는 일들이 없어요. 『정신문화연구』를 비롯하여 수많은 출판물의 발간, 대학원생들과의 독도 및 경주 남산 등 다양한 현장답사, 밤 새워 수작업으로 진행했던 연말정산, 기획조정실에서 처음으로 연구원 예산 300억 원을 확보했을 때의 기쁨, 연구/전문직 정원 증원, 교육부 산하 기타공공기관 경영평가 “우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들이 하나같이 소중하고 귀한 선물이었죠.

청계학당

청계학당 전경

그중에서도 ‘청계학당’ 건립은 한국식 전통 교육의 재현 및 한국문화 체험 학습의 외연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보람된 일로 기억돼요. 추위와 더위를 벗 삼아 하루에도 몇 번씩 현장을 돌며 안전사고 없이 수려한 한옥을 짓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당시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 오네요. 한옥은 세월이 흐를수록 목조가 갖고 있는 색이 더 깊고 아름답게 우러나 빛을 발하게 되는 멋들어짐이 있어요. 한국의 전통 목조건축 양식으로 아름답게 건립된 청계학당에서 한국의 멋과 품격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해요. 나아가 청계학당이 보다 넓게, 그리고 널리 활용되었으면 좋겠어요.



근무하시면서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이었나요?


무엇보다도 빼어난 근무 환경을 들고 싶어요. 연구원의 정문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짐을 느껴서 소풍 다니는 즐거운 기분으로 직장을 다녔던 것 같아요. 대학원 앞 정자 주변의 흐드러진 벚꽃은 무릉도원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대강당 앞의 곱디고운 단풍나무는 흡사 새색시 치마 같았죠. 늦은 가을 정문에서부터 시작된 은행나무의 노란 잎이 떨어지면 마치 금잔디가 깔린 듯했어요. 그 풍경은 지금도 변함없죠.

한 가지 더한다면 연구원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도 빼놓을 수 없어요. 인간의 가치를 탐구하는 인문학의 특성처럼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람들. 거기에 자연을 품고 있는 지리적 환경과 조화롭게 상호 소통하고 화합하는 마음들이 어우러져 연구원이 존재할 수 있는 동력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모두모두 그리운 대상들이죠. 지금도 마음 나눴던 연구원의 사람들과 아름다운 캠퍼스가 눈물겹도록 그리워집니다.


앞으로 개인적으로 연구원에 바라는 점이나 연구원에 남아있는 후배들에게 한말씀 해주신다면?


권미오 사진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선, 제가 퇴직자의 입장에서 말씀드린다면, 직장에 몸담고 있을 때는 근무 환경이나 업무의 강도, 적잖은 개인의 발전 기회 등 아주 훌륭하고 만족할 만한 여건이 조성되어 있죠. 그러나 퇴직을 하는 순간 퇴직자들은 투명인간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구원도 40년의 역사가 있듯이 연구원에 재직했던 사람들도 40년의 역사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 결속력과 구심체가 약한 것 같아서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어요.

연구원은 당초 설립목적과 시대적 요청에 맞추어 끊임없이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고 한국학의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기본적 의무가 있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속에 몸담고 있고, 몸담았던 사람들의 소중함도 생각하면서 항상 함께한다는 마음이 모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 한 가지는 여성에 대한 배려와 기회가 확대되었으면 해요. 대부분의 직장에서 입사 당시의 남녀 비율은 거의 반반이지만 고위직이나 주요 보직에 임용될 수 있는 확률은 위로 올라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적어지는 것은 연구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출산 등 여성만의 특이성이 있겠지만 여성의 섬세함과 투명성, 따뜻한 마음 씀씀이 등 사회를 부드럽게 움직이는 윤활유 같은 장점들도 많아요. 물론 여성 스스로도 끊임없는 자기 계발로 능력을 갖춰야 하겠지만, 균형 잡힌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여성에 대한 고운 시선과 다양한 기회 부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인터뷰 내내 연구원을 생각하는 강하고도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즐겁게 남은 나날을 즐기고 있는 그녀의 함박웃음이 연구원의 햇살처럼 밝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