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주년을 기념하며

40년의 꿈

이길상 사진
이길상 한국학대학원 원장

이 땅에 다시 한 번 찬란한 배달문화의 꿈을 피우고 현대 세계의 사상적 갈등과 혼미를 초극하는 예지의 등불을 밝혀보자는 원대한 꿈을 안고 오늘 우리는 이 연구원의 문을 연다.


1978년 6월 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개원식에서 당시 대통령이며 설립자였던 박정희는 기념사를 통하여 연구원을 설립한 의도를 위와 같이 천명하였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가 선언하였던 원대한 꿈은 여전히 실현해야 할 꿈으로 남아 있고, 우리 연구원은 제2의 개원을 모색해야 하는 시간을 맞고 있다.

1978년 6월 30일 개원식 모습

                                                                          1978년 6월 30일 개원식 모습.

개원 당시의 원대한 꿈은 어렵지 않게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국가가 부여하였던 외형적 권위와 참여자들의 역량이 대단하였기 때문이다. 기관의 성격은 재단이었고, 막강한 현직 대통령이 재단의 설립자였다. 1년 예산은 30억 원 규모로서 지금의 가치로는 600억 원 정도였다. 문교부장관을 역임하였던 역사학자 리선근은 동국대학교 총장직을 사임하고 초대 원장에 취임하였고, 2명의 부원장과 4개 연구부, 14개 연구실, 그리고 이를 지원할 기획실과 총무부라는 조직은 말 그대로 방대하였다. 부원장, 연구부장, 연구실장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은 당시 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들과 대통령의 측근들이었다. 출범 당시 연구1부장이었던 김철준 교수, 철학연구실장이었던 류승국 교수, 교육연구실장이었던 이상주 교수는 훗날 연구원의 원장과 교육부총리에 임명되었고, 연구2부장이었던 이규호 교수, 연찬발전실장이었던 이돈희 교수는 교육부총리가 되었다. 개원 당시 이사장은 장관과 부총리를 지냈던 태완선, 이사에는 윤천주 서울대 총장, 곽종원 건국대 총장, 정주영 전경련 회장, 박찬현 문교부 장관, 김성진 문공부 장관, 박충훈 무역협회장, 이숭녕 학술회 회원 등이 임명되었고, 감사는 한국은행 총재(신병현)와 합동통신사 회장(이원경)이 맡았다. 그러나 지난 40년의 연구원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학술기관인 연구원의 설립목적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권위나 참여자들의 명성에 의해 달성되지는 않는다는 엄연한 교훈이다. 이후에도 연구원의 원장으로는 전직 총리(이현재, 이영덕), 전직 부총리(이상주, 윤덕홍), 전직 장관(문홍주), 전직 대학총장(고병익, 정재각, 장을병, 김정배, 정정길, 이배용) 등의 명사들이 부임했지만 이들에 의해 연구원이 설립당시의 원대한 꿈에 크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외부의 권위에 의존해 기관을 운영하던지, 외부의 요구나 압력에 협력하는 것으로 기관의 역할을 설정하는 것으로는 학계의 기대를 충족시키거나 내부 구성원들의 학문적 역량을 모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전경

그간 연구원이 남긴 업적이 적지는 않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비문학대계, 고문서집성 등 한국학 분야의 기본 정보 집대성과 자료의 편찬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연구결과를 정리하여 출판한 단행본이 2,100 종 이상에 이른다. 한국학대학원을 통한 국내외 한국학 차세대 전문가 양성에도 나름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그러나 한국문화에 대한 학술연구를 선도함으로써 한국문화의 정수를 밝히고 미래 한국 사회의 좌표를 제시한다고 하는 설립당시의 목표달성에는 미흡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이제 40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40년 전에 선언하였던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40년을 시작할 때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40년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지혜 몇 가지에 귀 기울일 때이다.


첫째, 기관의 위상이나 권위는 외부에서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외부의 권위에 의존한 기관 혁신에는 한계가 있다. 40년 역사에 대한 겸허한 반성에 기초한 자기 혁신을 통해 연구원의 학문적 권위를 확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연구원이 출범 당시에 꾸었던 원대한 꿈의 중심은 한국학 분야 학술연구였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학술연구의 결과를 반영한 대학원 교육이어야 하고, 학술연구에 필요한 범위에서의 자료 집대성이어야 하며, 학술연구의 결과 확산을 위한 정보화와 국제화여야 한다. 학술연구와 무관한 채 이루어지는 교육, 자료집대성, 정보화, 국제화는 우리 연구원이 아닌 다른 기관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셋째, 국제화시대에 한국학의 세계적 보편성을 확보하고 한국문화가 인류문화에 크게 기여할 수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6백년 전에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여 조선조의 학문적 초석을 굳게 다졌듯이 우리나라 학문의 백년대계의 초석을 다지는 학술기관으로 거듭 태어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인간의 나이 40이면 불혹이라고 했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연구원도 이제는 외부의 온갖 유혹에서 벗어나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나이에 접어들었다. 40년 전 개원 당시에 설정하였던 원대한 꿈에 충실할 시간이다.

leegs@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