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의 향기

꽃과 나무를 사랑한 어느 선비

정수환 사진
정수환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책임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이제 개원 40주년을 맞이했다. 연구원의 캠퍼스는 고즈넉하면서도 품격을 갖추고 있어 시민들과 연구원 가족들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연구원이 개원할 당시 한국학 연구에 집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전국에 있는 좋은 꽃과 나무를 고르고 골라 심었다. 예쁜 꽃과 든든한 나무는 교육과 연구에 지친 사람들에게 심신을 다스리고 호연지기(浩然之氣) 함양 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 지난 40년 동안 연구원 가족들은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선비가 되었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꽃과 나무를 사랑하고 또한 거기에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경북 영덕의 무안박씨 종가에는 ‘경렴정(景濂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의 또 다른 이름은 ‘이오당(二五堂)’이다. 언뜻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모두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종가에 전하고 있는 고문서 중 그 실마리가 있다.


선생께서는 나이 들어 도곡리 마을의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고 정자를 지었다. 주위에 들꽃과 나무를 옮겨 심고 ‘이오당’이라 이름 했다. 꽃과 풀 그리고 나무 10가지를 품평하였으니, ‘이오’는 둘과 다섯이라는 숫자이다. 그리고 정자 앞에 연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어 편액을 ‘경렴정’이라 다시 걸었다. 주자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우러르고 따랐기 때문이다(『경렴정중수시첩』중에서).


1885년(고종 22) 겨울, 영덕 지방관으로 부임한 서기보(徐綺輔)가 남긴 글이다. 그는 관내 명문가에 전하고 있는 정자 경렴정에 주목하고 그 의미를 추적했다. 먼저 이 정자가 처음 지어질 때 이름이 ‘이오당’이었으며, 그 주인은 박선(朴璿)이라는 17세기의 어느 숨은 선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박선이 정자 주위에 사랑하는 화초와 나무 10가지를 심고 ‘이오’라고 이름 했다는 점을 발견했다. 무엇보다 그 앞에 연꽃을 심은 의도가 주자(朱子)에 대한 사랑이었음은 그가 찾은 첫 번째 단서였다. 주자가 가장 사랑한 꽃이 ‘연꽃’ 이었다.

이오당, 경렴정, 연정의 의미를 해석한 고문서(좌)와 그 정자의 모습

<이오당, 경렴정, 연정의 의미를 해석한 고문서(좌)와 그 정자의 모습>
※ 정자는 경북 영덕군 도곡리에 아직 남아있다.


이오당, 경렴정, 연정의 의미를 해석한 고문서(좌)와 그 정자의 모습

박선이 ‘경렴정’이라고 다시 이름을 붙인데서 서기보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계속해서 추적을 이어갔다.


마음속으로 선생을 흠모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오당’에 올라 보았다. 거기서 선생께서 남겨주신 뜻을 생각하며 소리 내어 ‘이(二)’와 ‘오(五)’의 꽃들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선생께서 당호의 이름을 화초와 나무 이름으로 지으신 뜻을 헤아려 보았다. 모든 꽃과 나무는 한 글자로 표시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10을 나누어 다섯 가지를 두 종류로 곱했을까?(『경렴정중수시첩』 중에서)


서기보는 직접 ‘이오당’에 올라가 박선이 사랑해 심었다는 화초와 나무를 세어 보았다. 대나무, 매화, 국화, 소나무, 오동나무 그리고 복숭아나무, 작약, 목단, 산수유, 두충... 이 때 발견했다. 박선은 굳이 10이라는 숫자를 2와 5로 곱했으며, 여기에는 은근하면서도 굳건한 암시가 있었다. ‘이오’는 바로 ‘음양(2)오행(5)’으로 자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주돈이(周敦頤)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설파한 우주와 자연의 원리 그것이었다. 모든 단서가 다 모였다. 서기보는 박선이 주돈이의 자연에 대한 사랑을 따르는 뜻에서 ‘이오당’으로 정자의 이름을 붙여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선은 주자와 주돈이를 자신의 공부와 삶의 지표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공부방 정자를 자기가 존경하는 멘토들을 연상시키는 단어로 이름 하였으며, 그 주위에 자신이 사랑하는 화초와 나무를 배치했다. 박선은 17세기 선비였고, 그 암호를 해석한 서기보는 19세기 학자로 200년의 시간을 건너뛴 대화였다. 이들 둘은 모두 주자학자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모두가 철학자였다. 주위의 모든 자연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그들의 화초와 나무와 어진이를 사랑하는 공식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지난 40년 동안 한국학의 심층 연구와 교육을 위해 거침없이 달려왔다. 그 기나긴 여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함께한 벗이 바로 연구원의 자연이다. 이제 한국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향해 달려갈 길이 열려 있다. 연구원의 많은 선비들도 캠퍼스의 아름다운 풀꽃과 나무들을 보면서 한국학 연구를 향한 새로운 의미를 담아 볼 수 있겠다.

swan@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