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의 향기

조선시대 과거 응시생의 시험 준비

원창애 사진
원창애
왕실문헌연구실 책임연구원

11월 22일은 일주일 연기되었던 고3의 수능시험 날이었다. 집에 수험생이 있건 없건 전 국민의 신경이 수험생에게 집중된다. 40여 년 전에 고3이었던 나도 예비고사 전날 시험을 치를 고사장에 가서 자리를 확인하고, OCR카드에 답을 적을 필기구와 지우개를 정성스럽게 챙겼던 생각이 난다. 어느 시대든지 시험을 앞둔 응시생의 마음은 다 똑같다. 조선시대 과거 응시생들도 과거시험 날이 다가오면 정성스레 준비하는 것이 있었는데, 시험 답안지 마련이 그런 것이다.

조선의 과거는 지금의 수능시험과는 달리 일종의 논술시험이었다. 나라에서는 귀한 종이를 과거 응시생에게 제공할 수 없었기에, 응시생들이 직접 시험 답안지를 마련했다. 이 시험 답안지를 ‘시지(試紙)’혹은 ‘명지(名紙)’라고 한다. 개인이 직접 마련해가는 시지는 응시생들의 경제 사정에 따라 품질이 달랐다. 나라에서는 시지의 품질과 크기에 대한 규정을 만들고 시지 견본을 배포했다. 시지의 품질은 하하품(下下品)의 도련지(擣鍊紙)로 하고, 시지의 길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1자 8치인데, 대략 80.8㎝정도가 된다고 한다.

해남 해남윤씨 녹우당 소장, 윤선도 시권

해남 해남윤씨 녹우당 소장, 윤선도 시권

해남 해남윤씨 녹우당 소장, 윤이석 시권

해남 해남윤씨 녹우당 소장, 윤이석 시권

현재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시지들을 보면 길이가 다양하다. 시지의 길이가 80.8㎝를 넘는 것들도 많은데, 시험과목에 따라 답안의 길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시(詩), 부(賦)와 같은 과목은 나라에서 제시한 크기의 시지로 가능하겠으나, 논(論)이나 대책(對策) 같이 논리적인 글쓰기는 이 시지의 크기에는 답안을 다 담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지를 여러 장 덧대어서 만들었다. 과거시험의 종류에 따라 응시생이 마련해야 하는 시지 분량이 달랐다. 3년마다 보는 과거를 기준으로 한다면 생원진사시는 2건~4건이며, 문과는 3건~7건까지 필요하다. 이중에는 대책으로 답안을 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보다 더 많은 시지가 필요했다.

17세기 전반기에 25년 동안 28회의 과거에 응시하였던 조극선(趙克善)이란 선비가 남긴 일기에는 자신이 치른 과거 시험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시험을 치르러 가기 얼마 전부터 시지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그는 충청도 덕산현의 유생이어서 시지 마련이 쉽지 않았다. 조극선을 비롯한 덕산의 유생들은 시지를 사지 않고, 덕산 가야사(伽倻寺)의 승려들에게서 제공받았다. 이곳 유생들은 종이의 재료가 되는 닥나무 껍질을 가야사에 싣고 가서 승려들에게 주어 종이를 만들게 했다.

시지는 여느 종이와 달라서 유생들이 직접 가야사에 가서 승려를 감독하여 품질이 좋은 종이를 만들게 하였고, 심지어 자신들이 직접 닥나무 껍질을 두드리는 일[搗鍊]을 하였다. 시지로 활용되는 도련지(搗鍊紙)는 다듬잇돌에 다듬어 반드럽게 만든 것으로 붓이 잘 움직이게 만든 종이이다. 그러므로 다듬잇돌에 잘 두드리려야만 답안 작성이 순조롭기 때문에 유생들은 삼삼오오 가야사에 올라가서 자신의 시지를 두드려서 다듬고는 누구의 종이 질이 좋은지 비교하며 기뻐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조극선도 닥종이를 열심히 두드리며 시험에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wonchangae@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