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의 향기

세상에는 공짜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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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환
고문서연구실 책임연구원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을 우리는 흔히 듣고 또 흘려버린다.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공짜’로 제공되는 기념품이나 ‘1+1’ 행사 품목도 결국에는 모두 가격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면서 우리는 만족을 굳이 느끼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면 공짜가 아니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교훈적인 이 ‘금언’은 사실 옛 사람들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 사이에서도 무료, 공짜는 없었다.

조선시대는 ‘효(孝)’가 곧 국시(國是)였다. 자식들의 효를 부모들은 마음의 저울로 달아보고 그에 대한 대가로 사랑이 담긴 재산을 물려주었다. 옛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 극단적인 사례가 있다. 양자로 입양 한 자식에 대해서마저도 이런 원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이 양부 박세현(朴世賢, 1531~1593)으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후 관청에서 발급받은 증명문서[입안]에 첨부된 분재기 중 일부이다.

문서사진

1603년(선조 36) 박의장이 영해부에서 양부 박세현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의 소유권을 확인 받으면서 발급받은 문서 입안
※ 박의장은 1577년과 1584년 박세현으로 부터 분재 받을 당시의 문서를 증빙자료로 제출했다.

너를 3살이 되기 전에 강보에 싸서 데려와 내가 길렀다.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내가 주위사람들을 볼 때 마다 아름다운 말을 듣게 해 주어 나에게 기쁨이자 큰 영광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의 명예를 더욱 빛내었으니 효도 중에 이보다 더 큰 효도가 없다.

(1577년 박세현이 수양자 박의장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며 쓴 글 중에서)

박세현은 아주 어린 박의장을 양자로 삼아 길렀다. 그러다가 박의장이 23세의 나이로 1577년(선조 10) 대과에 당당히 급제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부모의 가장 큰 행복이 자식 자랑이다. 하물며 조선시대 가장 큰 가치 중 하나인 과거급제인 경우는 개인의 행복을 너머 가문 공동체의 큰 영광이기도 했다. 박세현의 말처럼 효도 중에서도 효도였다.

합격증 문서 사진

<1577년(선조 10) 박의장이 무과에 합격하고 받은 합격증(좌)과 함께 합격한 명단 방목에서 확인되는 관련기록>

※ 방목에는 박의장의 아버지는 박세현으로, 생부는 박세폄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세현은 주위의 모든 친척은 물론 친구와 지역 사람들로 축하를 받고 부러움을 샀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큰 명예이자 기쁨이었다. 따라서 당연히 그는 양자 박의장의 ‘효’에 대해 정산하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건장한 남자종 2명과 문전옥답 4,500평을 박의장에게 사랑을 담아 선물했다.

박의장이 과거에 급제 하자 그의 친아버지 박세렴(朴世廉, 1535~1593)이 은근히 파양했으면 하는 마음을 비쳤다. 박세현은 국법과 동생의 마음을 헤아려 박의장을 생부에게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자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정의 관료인 내가 너를 양자로 들인 것은 조금 곤란한 면이 있었다. 따라서 은혜와 사랑의 관계를 끊어 파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동생[박세렴]도 마음을 터놓고 나에게 이야기 했다. (중간생략) 그러나 너는 20년이 넘도록 나를 아버지로 모시고 살았으니 그 정성과 의리가 부모 자식과 같고 은혜와 사랑이 너무도 크다. 그러므로.....

(1584년 박세현이 박세렴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며 쓴 글 중에서)

박세현은 박의장을 파양하기로 결정했지만 생각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박의장이 그에게 주었던 희노애락이 녹아든 ‘애정(愛情)’ 그리고 과거 급제의 영광이 준 ‘행복(幸福)’에 대해 마음을 표현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정산으로 박세현은 노비 3명과 논밭 2,100평을 파양에 즈음하여 박의장에게 건넸다.
부모와 자식의 사랑을 매정하게 계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 옛 사람들은 계기가 있을 때 마다 자식들에게 무언가 선물했다. 그 계기라는 것은 질병이 회복되거나, 혼인을 하거나, 손자녀를 보거나, 과거에 급제하거나 등등 부모를 기쁘게 하는 모든 것들이다. 부모는 마음의 저울이 움직일 때 마다 정산을 했다. 물론 부모와 자식의 정리를 이러한 정산을 통해 단절 혹은 마감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직접 문서에 글로 써서 그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사랑과 선물에 대한 의미 부여이고, 자식에게는 면려의 뜻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말과 글로 하는 대화였고, 말하고 써 줘야 했다.
오늘날에도 ‘효’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 옛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세상에 공짜가 없음을 부모와 자식은 알아야 한다. 자제들에게 선물을 할 때에는 그 의미를 담아야 하며, 자식들은 새겨들어야 한다. 또한 부모들도 명심해야 한다. 자식들에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swan@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