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연 사람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신이라는 사실이 칭찬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생활하겠습니다."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강문종 그리고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신이라는 사실이 비난이나 욕설 대신 칭찬이나 필요성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생활하겠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책임연구원!

2017년 8월 31일까지 허락된 저(강문종)의 직책입니다. 학술지 장서각을 발간하고, 기타공공기관경영평가 자료를 작성하며, 전시회를 준비할 때 아주 조금의 기여를 하고, 가끔 금요강독회 발표를 하기도 합니다. 매년 평균 2~3개 정도의 연구과제에 참여하고, 평균 1년에 2편 내외의 논문을 쓰기도 합니다. 장서각아카데미와 찾아가는 한국학 아카데미에서 시민들과 소통하며, 찾아가는 한국학 콘서트에서 청소년들과 만나기도 합니다.

유난히 단풍이 아름다웠던 어느 초겨울!

입학시험을 치르던 그 해(1999년) 초겨울 단풍은 유난히도 붉었습니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후 면접시험이 있던 날 부유섭 박사님(고전번역원 연구원, 당시 석사 2차) “야, 면접을 보러 가는데 『논어』라도 한 번 더 보고 들어가라!” 그리고 그냥 무심코 펼친 곳은 놀랍게도 「위정」, <제17장>이었습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이 구절은 지금까지도 메모장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후 저는 연구원의 한 주체로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삶의 Turning point!

통합과정 3차에 석사학위를 취득할 것인가? 아니면 통합과정으로 계속 갈 것인가? 라는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임치균 교수님(지도교수)이 제게 물었습니다. 석사학위 받고 나서,

대학원을 바꿀 생각이 있니? 없습니다!

잠시 직장생활 할 생각 있니? 없습니다!

혹시 유학은 생각해 봤니? 없습니다.

그래, 그럼 계속 가자!

석사학위 수료장면

정신없이 보냈던 대련외국어대학교 생활

수료 후(2005년 여름) 파견교수로 가게 된 대련외국어대학교 한국학과에서는 매주 14시간의 학부 강의, 6시간 대학원 강의, 한국어 말하기 동아리 지도 2시간, 각종 한국어 말하기 대회 참가자 지도, 웅변 대회 참가자 지도, 논문 심사 까지! 이때부터 저의 일복은 터지기 시작한 듯합니다.

정신없이 보냈던 대련외국어대학교 생활

강문종 사진

2006년 12월부터 대학원 조교를 시작하였고, 2007년 7월 1일 연구원으로 채용되었습니다. 조교를 할 때부터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에서, 정해진 컴퓨터로, 정해진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상당한 고통이었고, 약 1년 정도의 적응기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기간 난생 처음 원형탈모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까?! 45개월의 연구원, 72개월의 선임연구원, 4개월의 책임연구원을 거치면서 박사학위 취득과 결혼 등의 사적인 성취를 비롯하여 연구원을 위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제가 받는 인건비 대비, 저의 일이 그만한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수시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우울했던 팀장 역할

2014년 9월 5일에 직무대리로 대외협력팀장 발령을 받은 후, 연말까지 왠지 모를 우울감이 지속되었습니다.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안정과 편안함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심리적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연약해진 정신을 바로 잡을 도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기회에 막연했지만 이직(移職)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17년을 되돌아 보면...

2005년 가을체육대회
2008년 대학원 해외답사_인도
2008년_대학원 회의
2012년 키르키즈스탄 한국학사업 설명회

혹자는 퇴직 후 전 직장을 향해 오줌을 누는 것도 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보낸 17여년은 참으로 행복한 순간들이었습니다. 특히 다양한 전공자들이 함께 공부했던 학창시절, 주니어 국제 한국학 학술대회와 그 결과물을 출판했던 순간, 신규 사업 계획서를 작성한 후 예산 배정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던 순간, 공동연구 결과물이 출판되었던 순간, 찾아가는 한국학 아카데미·콘서트에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던 순간 등, 뭉클했던 장면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영화처럼 각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쉬웠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한국학대학원 교학실에서 운영 시스템을 보다 효율적으로 시행하지 못했던 일, 대외협력팀에서 한국학 대중화 사업 시행에 고심했던 일, 장서각 소장 왕실 한글자료의 정리 및 연구를 욕심만큼 이루지 못한 것, 그리고 특히 수많은 분들에게 신세만 지고 제대로 갚지 못한 일 등... 생각해 보면 아쉬운 일들이 더 많았지만, 이러한 일들을 고민하고 추진해갔던 과정 역시, 참으로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Begin Again!

정말 많은 빚을 졌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한국학대학원의 운영 시스템, 부족한 제가 10년 넘게 꿈을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준 한국학중앙연구원, 형편없었던 섬마을 소년을 박사로 키워주신 임치균 교수님, 행정과 직장생활의 가이드 역할을 해 주신 권미오, 노인숙, 임정훈, 곽선영, 윤대봉 선생님, 부족한 팀장을 끝까지 도와주었던 김은양, 전효진, 김경은, 성현서 선생님, 나의 가장 좋은 친구 성우순 선생님,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분들이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신이라는 사실이 비난이나 욕설 대신 칭찬이나 필요성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생활하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진 많은 빚을 갚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1개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야, 강문종! 뭐, 교~~~수가 되니까 ……’입니다. 착잡합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며 무슨 대답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저로 봐주시고 기회가 되면 많은 질책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