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한민족의 공공철학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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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희
왕실문헌연구실 책임연구원

한민족의 전통사회 속에서 효는 사회통합의 기능을 발휘한 공공철학의 중요한 요소였다. 사실상 현대 자본주의 상품소비사회 속에서도 효는 공공철학의 규범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4차산업혁명 시대를 목전에 둔 즈음에도, 인간은 물질적 만족으로만 살 수 없는 윤리적 존재이다. 우리 문화에 전래되고 있는 정서 중에, 효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 풀이 난다는 교훈이 있다.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면 기적적인 천우신조(天佑神助)가 나타나듯이 어려운 상황이 잘 풀린다는 교훈으로 전해지는 말이다. 부모에 대한 효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우리 조상들의 전통적 도덕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 말은 실제의 효과를 보지 못하더라도 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셔야 한다는 사회적 “공공성”을 담고 있다.

우리가 어린아이 시절부터 소중한 가치로 배우는 공공(公共)의 보편적 가치 중에 도덕이 있다. 우리는 문명화된 사회생활에서 우리 인간들을 조화롭게 공존하게 하는 하나의 공공원리로서 대체로 도덕을 제시한다. 사회생활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우리 인간이 공공적 가치로서 도덕을 인지하고 준수함으로써 사회의 질서와 조화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공공의 삶과 유리된 개인의 삶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사회를 지탱하는 공공의 원리가 있다. 그 원리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 구성원들 사이에 훌륭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의 존속은 공공적 가치가 내면에 원리로 작동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기적 인간의 욕망이 구축하는 경제적 소유욕을 지향하면서도, 언제나 그 욕망의 소유욕을 조화롭게 화해시키는 도덕성의 가치창조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도덕적 본성과 함께 이기적 욕망을 타고난다. 이기적 욕망은 실용적 경제성의 원리에 따라 개별적 이해관계를 분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도덕적 본성은 진위(眞僞) 또는 정사(正邪)를 기준으로 사회적 공공의 가치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만약 공동체를 유지하는 각종 정책을 수립하거나 공동체 구성원의 갈등구조를 제어하는 법규를 제정할 때, 공공성의 가치실현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은 점점 줄어들다가 결국 사멸할 것이다. 이것은 동서양의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는 엄연한 교훈이다. 공공성을 저버리고 사사로운 이익으로 국민을 지배한 정부는 존속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공공성의 가치는 절대 훼손될 수 없는 문명사회의 근본가치이다. 예컨대 공공철학의 눈으로 볼 때, 구체적 사회현실 속에서 공공의 가치 실현을 돌보지 않는 관료는 사회문화를 파괴하는 적과 같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 인지능력을 구비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지속하는 일관된 원리원칙을 지닌다. 이것을 인생관 또는 인생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바른 인생관을 지닌 사람은 바른 인생을 영위할 확률이 높다. 당연히 그른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그른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사회나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바른 인생관을 위하여 끊임없이 가치에 대한 회의와 반성 그리고 굳건한 다짐과 훈련을 반복하듯이, 사회도 공공의 가치 정립과 구현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시험하는 공공철학이 요청된다. 우리시대가 요청하고 있는 공공철학이란 무엇인가?

공공철학(Public Philosophy)은 공공성(公共性)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의미와 실현에 관하여 근원적으로 탐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이다. 공공성(public nature)은 한 개인이나 개별적 조직에 국한된 가치가 아니라 사회문화 전체에 두루 통용되는 성질의 가치를 말한다. 공공성이 기능을 발휘하는 상황이나 분야는 매우 많을 수 있다. 법적 토대에 기초하여 사회정의 실현을 이루고자 하는 법학,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의사소통의 원활한 실현을 추구함으로써 상이한 인간가치의 조화를 이루고자하는 커뮤니케이션, 이기적인 인간욕망과 자연생명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계를 지향하는 환경생태학, 개인의 자유와 행복 실현이 가장 원만하게 실현되는 인간세상 구축과 경영을 꿈꾸는 정치학, 새로운 소식을 기반으로 공동체의 가치담론을 주도하면서 시민의 의식과 지혜를 항상 깨어있게 자극하는 정의로운 언론, 그리고 따스한 감성의 미학적 공감과 조화를 지향하는 예술에서조차도 공공성의 보편적 가치 실현이 근본적 원칙이 된다.

실존적 인간이 다양한 상황과 분야에서 시도하는 모든 삶의 노력 속에는 공공성의 가치 구현이라는 원리가 작동한다. 공공성을 담지하지 않는 인간의 사회문화와 생활세계는 생생한 지속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적 생명력이 없다. 시민, 국가, 자유, 평등, 법, 정의, 복지, 윤리 등 인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공공성의 가치가 지닌 다양한 내포(內包)들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그 공공성의 참된 의미와 실제적 구현 방법에 대하여 진지한 반성적 사유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공공성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시도하는 것이 공공철학이다. 그러므로 공공성이 구현되는 세상을 위하여 공공철학이 요청되는 것이다. 진지하게 음미(吟味)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공공철학의 통찰력에 기초하여 치열하게 반성되지 않는 공공성은 병든 이데올로기로 무가치하게 전락하기 쉽다. 우리가 공공철학을 삶의 현장에서 가까이에 두고 끈질기게 끊임없이 탐구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올바른 공공성인가? 나라를 경영하는 관료지도층, 경제적 생산과 문화적 역량을 이룩하는 시민들, 조국과 민족을 지키는 군인들, 학생을 가르쳐서 나라의 동량을 길러내는 교육자 등등,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에게는 각자의 삶의 현장에 맞는 공공성의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 나라 이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보편적으로 누구나 지켜야 될 공공성의 가치가 있다. 최선의 공공성은 누가 미리 정답을 정하여 배타적으로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치열한 삶 속에서 함께 토론하고 실험하며 가장 좋은 공공성의 가치를 찾아 확립해 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충효와 예의염치 같이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가치가 있을 것이며, 기사도와 개인주의 같은 외래의 가치도 있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 시대를 지배했던 어떤 위대한 가치라도 급변하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무비판적으로 답습한다면, 그것은 노예적 삶을 양산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뿐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철학이 극소수 지식전문가의 전유물이 될 수 없듯이, 공공철학은 소수의 전문가 집단이 배타적으로 구축하거나 제조할 수 있는 가공물이 아니다. 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치열하고 진실한 노력을 경주하는 사람들이 공동주체가 되어, 자신의 생활현장에서 얻은 지혜와 통찰력을 나누고 공유하며 반성하는 과정 속에서 성숙해가는 조화로운 공동체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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