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의 향기

미루는 습관보다 더 큰 병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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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수
고문서연구실 선임연구원

올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폭염을 경고하는 안내 문자가 걸핏하면 울려대고, 높은 습도와 찜통더위가 밤새도록 수그러들지 않았다. 유독 여름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무기력의 시즌이다. 며칠 전 윤기(尹愭, 1741∼1826)의 문집을 건성으로 넘기다가 <벽에 써서 스스로 경계하다>라는 글에서 시선이 멈췄고 내심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금을 통틀어 사람들의 가장 큰 병통은 미루는 습관이다. 아침에 할 일을 미루다가 저녁이 되고, 오늘 할 일을 미루다가 내일이 된다. 하루를 미루다가 열흘이 되고, 일 년을 미루다가 십 년이 되며, 십 년을 미루다가 백 년이 된다. 이에 일단 모면하고 보자는 습관이 차츰 커지고, 이로 말미암아 나태하고 불성실한 버릇이 고질병이 되어,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화살처럼 빠른 세월을 헛되이 보내버리고, 꾸물대는 사이에 변화무쌍한 기회를 모두 놓치고 만다. 결국 세상일을 실행할 만한 시간이 없게 되니 어찌 어석하지 않은가!

미루는 습관 때문에 후회하고 자책하는 일은 옛사람도 매한가지인가 보다.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는 자기 관리에 철저한 인물처럼 여겨지나 위 글귀를 보면 그도 일상의 게으름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하다. 습관처럼 미루는 버릇은 나태와 불성실이라는 고질병으로 귀결되는데 이 단계에 접어들면 손쓸 길이 없다.
윤기는 같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라가 쇠약하여 국력을 떨치지 못하는 근원을 따져 보면 미루는 습관 때문이다. 집안이 뿔뿔이 흩어져 수습하기 어려운 까닭을 살펴보면 미루는 습관 때문이다. 사람들이 빈둥대다가 늘그막에 이르는 이유를 짚어 보면 미루는 습관 때문이다.” 작게는 패가망신부터 크게는 국가의 쇠망까지 모두 미루는 습관에서 기인한다. 누가 시킨 게 아니니 핑계될 일도 없다. 나를 나락으로 떠민 것은 바로 나다. 정신이 버쩍 든다.
그렇다면 나태한 버릇을 어떻게 고칠까? 윤기가 제시한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크게 분발하고 마음을 다잡아 용감하게 떨쳐 일어나서 변함없이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굳이 불교용어로 풀자면 대결정심(大決定心)과 용맹정진(勇猛精進) 정도가 될까. 석가모니가 출가하여 보리수 아래 좌정한 뒤 “깨달음을 얻지 않는다면 이 자리를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게 대결정심이다. 이 정도 각오없이 뿌리 깊은 습관을 고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시작을 못하는 사람은 없으나, 마무리를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라는 시구가 「시경」에 보인다. 유시무종(有始無終)을 경계한 표현이다. 누구나 우물을 팔 수 있지만 샘에 도달하기 전에 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렇다면 앞서 들인 공력은 다 수포로 돌아간다. 어떤 일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발을 동동 구르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어차피 감당할 일이라면 지금 당장 처리하는 게 현명하다.
게으름은 쇠붙이에 슨 녹과 같다. 노동보다도 더 심신을 소모시키는 게 게으름이다. 게으른 자는 구제불능이다. 본인이 자각하여 분발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다. 인(仁)의 화신인 공자(孔子)도 게으름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어느 날 재여(宰予)라는 제자가 낮잠에 빠져 있었다. 우연찮게 그 모습을 본 공자는 “썩은 나무는 아로새길 수 없고, 거름 흙으로 만든 담장은 흙손질할 수 없다.(朽木, 不可雕也, 糞土之牆, 不可杇也)”라 말하며 호되게 꾸짖었다. 독설에 가까운 꾸지람으로 불호령을 내리는 공자의 모습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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