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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과학 기술의 도입과 정착 과정을 정리한 ‘한국 근대과학 형성사’ 간행

김연희 사진
김연희
서울대학교 연구교수

「한국 근대과학 형성사」(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도서출판 들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의 지원으로 추진되고 있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의 여섯 번째 권으로 간행되었다. 2010년 12월부터 5년간에 걸친 연구, 집필 과정을 거쳐 2016년 9월 최종 간행되었다. 이 책에서 필자는 개항 후 조선 사회에서 근대 과학기술이 도입·수용·이해·이용되는 과정을 정리하면서 한국의 근대 과학의 도입과 수용 시기를 일제 강점기 이전으로 앞당겼다.

<한국 근대과학 형성사>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 제6권

저자
김연희
출판사
들녘
분류
역사_한국사_한국문화
ISBN
9791159251993

필자는 조선정부 주도 아래 도입된 근대 과학기술로 나타난 조선의 변화 양상을 1876년의 개항으로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40여 년의 기간 동안 살펴보았다. 이 기간을 개항 이래 광무개혁(光武改革), 광무개혁부터 을사늑약, 을사늑약 이후 경술국치까지로 나누어 고찰했다. 이 40년 동안 이루어진 근대 과학기술이 수용되고 적용된 사회 전반의 변화들을 추적한 것이다. 조선정부의 근대 과학기술 도입 정책 및 제도의 정비, 근대식 무기 도입을 위한 노력과 진행 추이, 근대 교통 특히 철도 시스템의 도입 모색 및 결과, 전기통신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 통신 체계 도입과 전환, 천문학과 지리학 등을 중심으로 한 자연관 및 세계관의 근대적 전환, 근대 교육 제도의 구축 및 전문학교 운영 상황 등이 포괄되었다. 이 각 주제들의 도입 및 변화 양상이 시기별로 다루어진 것이다.


이 연구로 두터운 지적 전통을 구축한 조선 사회에 도입된 근대 과학기술은 이 견고한 조선 사회를 빠르게 변화시켰다는 점을 보일 수 있었다. 조선 정부는 근대 서양 과학기술을 강병부국(Wealthy nation with Strong power)을 위한 실용적 도구로 인식해 전통적 ‘도(道)’를 강화시키고자 했지만, 의도와는 달리 조선 사회의 견고한 틀을 해체시켰음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전차(tram)는 가장 극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신분제 폐지라는 제도적 개혁을 사회적으로 목도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양반과 상민 및 천민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전차라는 공간을 함께 점유했다. 또 전통적 규율에 따라 여닫혔던 성문은 전차의 왕래로 더 이상 닫히지 않게 되었다. 이는 성 안팎의 구분을 해체시켰고 더불어 통금도 해제되었다. 또 근대적 통신 체계의 도입으로 민간에서의 소통이 자유로워졌다. 특히 전신은 소통의 영역을 중앙과 지방 정부 사이뿐만 아니라 민간 사이로 확장시켰고 조선을 국제사회로 진입시켰다. 국제사회와의 소통은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7요일제, 24시각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서양의 태양력 도입의 필요성을 낳았다. 이런 변화는 서양 근대 사회의 표준적 시각 체계가 조선에도 적용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500년을 이어온 조선 전통의 시각 체계도 영향을 받아 전환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1895년 이래 추진한 근대 교육 제도의 도입으로 신분제에서 자유로워진 학도들이 새로운 학문을 학습해 전통의 유교 교육을 축소 내지 해체시켰음도 큰 변화 가운데 하나이다. 또 전보학당(Engineering collage for telegram), 의학교(Medicine collage) 같은 근대 기술전문학교들도 수립해 정부는 필요한 인력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조선사회에 도입된 근대 과학기술에 따른 변화는 일제강점기에 비로소 근대 과학기술이 도입되었고, 일본에 의해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주장, 그리고 근대 과학을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인의 고루하고 아둔하며 완고한 민족성에 관한 주장들이 식민 지배를 위해 만들어진 선전도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조선 정부가 강병부국에 실패했음을 부인할 수 없고, 또 이 근대 과학기술 도입 과정을 살피는 작업이 조선 정부에 면죄부를 부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일제가 선전하듯 과학기술을 도입하지 않아서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조선정부는 근대과학기술을 도입했는데에도 왜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은 “개항 이후 조선 정부가 부국강병의 핵심을 이루는 과학기술 도입에 열심이었다면 왜 일본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가”라는 의문을 포함한다. 먼저 조선 정부가 과학기술 도입을 통한 개혁 사업을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추진하지 못했음을 들 수 있다. 이는 조선 정부 자체가 강력한 주권을 확보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했다. 열강의 간섭과 제재, 혼란한 국내 상황은 조선 정부의 국정 개혁을 방해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선 정부가 기획하고 설정했던 많은 개혁 정책들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광무개혁과 같은 국면 전환이 필요했다. 이때에야 비로소 서양의 과학기술 도입 사업 전개와 관련한 지속성을 확보했지만, 이나마 일본의 강압적인 을사늑약으로 저지당했다. 또 한 가지 조선 정부의 빈약한 재정 상태도 실패의 요인으로 들 수 있다. 서양 과학기술이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는 사회는 이미 자본이 집약된 자본주의, 심지어 자본이 국가 권력과 결탁한 제국주의 사회였다. 적지 않은 서양의 과학기술은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연구되었다. 심지어 전기, 화학과 같은 첨단 과학은 아예 기술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전기공학, 화학공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형성하기까지 했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서양의 공장들에는 대량 생산 체계가 확립되었고, 이는 더 나아가 산업 시스템의 구축으로 이어졌다. 이는 거대한 투자 자본을 필요로 한 것인 만큼 청의 간섭을 받아야 했던 조선이 이를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의 근대 과학기술은 이미 일제강점기 이전에 도입되어 조선 사회와 상호 적응하고 있었다. 일제가 한국을 근대화시키고 계몽하기 위해 근대 과학기술을 도입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개항을 통해 도입된 근대 과학기술이 모색의 기간을 지나 조선 사회에 적용되고 사회를 변화시키며 상호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근대 과학기술의 세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은 일제강점기가 아니라 적어도 1897년, 광무개혁으로 1880년대 지지부진했던 개혁들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로 앞당겨져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