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정부 청사 소속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국문화와 한국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정체성을 함양하기 위해 근무 현장을 직접 찾아 강연하는 ‘세종시, 찾아가는 한국학아카데미’ 프로그램을 KTV 정책방송을 통해 방송합니다. 한국학대중화프로그램의 콘텐츠를 보다 넓게 확산 시키고 많은 분들이 공유 할 수 있도록 방송은 물론 SNS등을 통해서도 공개할 예정입니다.
4월 19일
<파워특강> 서사, 역사 인물을 품다
신간 ‘카터와 대북정책’ 발간
이완범 교수가 7년여의 연구 끝에 펴낸 ‘카터 시대의 남북한 – 동맹의 위기와 민족의 갈등’을 소개하기 위해 저자 인터뷰를 동아일보와 연합뉴스에서 진행하였습니다. 이완범 교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동북아 정세에서 외교 문제에 봉착한 지금 시점에서 미디어는 카터 시대에 주목하였습니다. 남북한 관계 개선을 위해 카터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분석한 이완범 교수가 말하는 남북 관계 및 외교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해결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어 KTV에서 임시 정부 수립을 기념으로 진행한 생방송 정책 오늘에서는 이완범 교수가 출연하여 임시정부수립의 의미와 시대적 과제 등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美 선제타격 막으려 방북… 카터의 결정은 옳았다.
학계에서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는 두 인물로 읽힌다. 보수 성향의 일부 학자들은 그를 친(親)김일성 정치인이라고까지 평가하는 반면 진보 진영에선 1994년 북한 핵 위기 때 한반도를 전쟁의 위기에서 구한 인물이라고 본다.
이완범 교수는 ”1977년부터 카터가 추진한 3자회담은 이후 4자, 6자회담으로 발전했다”며 ”카터의 제안은 동북아에서 다자간 외교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밑거름이 됐다는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56)가 7년여 집필 끝에 ‘카터 시대의 남북한―동맹의 위기와 민족의 갈등’을 최근 펴냈다. 그는 2011년 30여 년 만에 비밀 해제된 ‘카터 시기 한미 외교 문서’를 통해 1976∼79년 당시 한국과 미국, 그리고 북한의 관계를 연구해 왔다.
6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교수는 “카터는 도덕주의자로 불리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인”이라며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면서도 북한의 인권 탄압과 5·18민주화운동 당시 한국 상황엔 눈감았던 걸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좌파 학계가 집필을 주도한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우파 학계 주도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저자로 모두 참여했던 중도적 학자다. 그는 또 ‘한국전쟁’(2000년) ‘삼팔선 획정의 진실’(2001년) 등 한국 냉전사(史)를 다룬 저서를 여러 권 냈다.
“카터 시기 한미 동맹이 위기에 빠졌던 건 박정희 정권이 핵무장을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과 직접 접촉해 한반도 평화 체제를 구축하고, 한국의 핵 무장을 불필요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카터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1974년부터 한국의 핵 개발 움직임을 감지했다. 1977년 대통령이 된 카터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추진한다. “북한은 북-미 양자회담을 원했지만 카터는 남북한을 대화 테이블에 앉히는 3자회담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카터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동북아 외교의 핵심 의제로 삼은 이유를 세 가지로 분석했다. △전쟁 억제 △한국의 핵 무장 견제 △개인의 정치적 업적 달성이다. “카터는 냉전 종식을 자신의 정치적 업적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중동 최초의 평화협정이라 불리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1979년)도 그 일환인 거죠.” 하지만 카터가 추진했던 3자회담은 김일성의 거부로 성사되지 않는다.
1994년 북한 핵 위기 당시 만난 지미 카터(오른쪽) 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일성. 사진 출처 The Carter Center
카터는 퇴임 후에도 한반도 평화 사절로 나섰다. 1994년 북한 영변 핵 시설에 대한 미국의 선제타격론이 나왔을 때 카터는 이를 막기 위해 방북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훗날 선제타격하지 않은 걸 ‘임기 내 최대 실수’라 밝혀 논란이 됐다. 하지만 이 교수는 당시 카터의 행보가 옳았다고 평가했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북한을 선제타격하면 100만 명의 희생이 있을 것으로 분석했죠. 6·25전쟁 때 300만 명이 희생됐어요. 피의 대가로 평화를 얻는다 해도 온전히 치유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옳은 결정이었습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둘러싼 갈등과 도널드 트럼프 시대 개막, 북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 피살 등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동북아 정세에서 내달 출범하는 새 정부가 카터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일까. “대결 국면으로 가기엔 코리아 디스카운트 등 한국이 잃을 게 너무나 많습니다.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미국의 핵우산 아래 남북 간 대화협력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심지어 전쟁 중이라도 대화 채널은 있어야 합니다.”
서울 신문을 통해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런웨이조선’에서는 4월을 맞아 다양한 주제로 전통 멋쟁이의 모습을 소개 했습니다. 전통시대 사람들이 즐겨 입던 흰색 옷을 주제로 한 기사에는 “우리의 흰옷은 오히려 비어 있는 색이기에 앞으로 더 많은 가능성을 담을 수 있지 않겠냐는 마지막 문장이 가슴에 와 닿는다”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이후 지나친 가체로 목이 부러지기도 했다는 조선 여성의 헤어스타일을 소개하는 기사에는 서양의 코르셋이나 군함머리와 비교하며 다양한 의견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특히 조선 여성들의 피부 관리에 대해 짚어 본 기사에는 "조선 여성은 중국이나 일본 여성처럼 덧칠하는 화장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피부 미용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정성을 쏟았다.”며, “물광 피부의 원조, 조선의 언니들 피부 관리 좀 보고 가실께요~”라는 익살스러운 반응도 있었습니다. 5월에는 전통옷의 착장의 기술과 다듬이소리에 숨어 있는 이야기, 복주머니 이야기 등을 담아낼 예정입니다.
세계일보 토요판을 통해 매주 연재하고 있는 한국사의 안뜰 칼럼에서는 본격적인 봄의 시작인 4월을 맞아 조선 국왕이 건강을 위해 행했던 온천 여행에 대해 흥미롭게 소개했습니다. 온행의 집중되던 시기인 음력 2, 3, 4월이 바로 지금과 같은 시기라서 이런 날씨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왕의 기분을 그려내기 좋았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어 한국의 기록문화 역사를 이어오는데 큰 역할을 해 온 전통 인쇄 장인의 이야기를 담은 칼럼에서는 지식의 전파와 기록의 전달에는 인쇄 장인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그 역할에 비해 기록이 적고 연구할 부분이 많다는 점을 짚으며 ‘전통 인쇄 문화의 빈자리’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성남시 공보 소식지 비전성남 5월호 <장서각 산책>에서는 장서각 강문종 책임연구원이 정조가 시행한 노처녀, 노총각 혼인 프로젝트를 흥미롭게 소개했습니다. 칼럼에서는 대한민국의 혼인 건수가 4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발표를 접하며, 청년실업률은 계속 높아지고, 내 집 장만은 더 힘들어지는 등 경제적 빈곤이 혼인 회피로 이어지는 현상을 직면한 우리에게 역사가 가르쳐 준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흥미롭게 소개했습니다.
국가가 나선 노총각, 노처녀 결혼 이야기
강문종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통계청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2016년, 대한민국의 혼인건수가 40년 만에 최저 수치를 기록했다. 청년실업률은 계속 높아지고, 내 집 장만은 더 힘들어지는 등 경제적 빈곤이 혼인 회피로 이어지는 현상을 직면한 우리에게 역사는 국가의 역할을 가르쳐줬다.
“자녀가 30세가 가까워도 가난하여 시집을 못 가는 자가 있으면, 예조(禮曹)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헤아리고 자재(資材)를 지급한다. 집안이 궁핍하지도 않은데 30세 이상이 차도록 시집가지 않는 자는 그 가장을 엄중하게 논죄한다.”
이 내용은 조선시대 『경국대전』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경제적 사정으로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국가가 나서서 혼인을 시켜야 하며 노처녀가 되도록 시집을 보내지 않은 부모는 처벌한다는 조항을 법전에 올려놓았다. 늦도록 혼인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문제임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1791년 2월 어느 날 정조는 한성(漢城) 오부(五部)에 명해 경제적 어려움으로 혼인하지 못한 백성들에게 돈과 포목을 지원하는 혼인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그 결과 1791년 5월까지 남녀 한 명씩을 제외하고 모두 혼인할 수 있었다. 한쌍의 남녀가 혼인하지 못하고 남아 있다는 소식을 접한 한성판윤(서울시장)과 관리들은 난리가 났다. 왕이 야심차게 추진한 혼인 프로젝트에 오점을 남기게 된 것이다. 모두가 전전긍긍할 때 절묘한 제안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을 결혼 시킵시다.” 그야말로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이 아닌가! 정조는 이 두사람의 혼인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국가가 혼인을 직접 주관하게 했다. 일반 백성의 혼인을 위해 국가 전체가 나서게 되는 사상 초유의 대형 혼인 이벤트가 펼쳐진 것이었다. 김희집과 신씨의 혼인 이벤트는 당시 큰 화제를 낳았다.
희곡작가 이옥은 이 소재로 단 3일 만에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인 <동상기(東床記)>를 지었다. 이 작품에서 결혼을 바로 앞둔 노처녀 신씨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측간으로 달려가 가만히 개를 불러 말하였다. “멍멍아, 내가 내일 모레면 시집을 간단다.”… 단지 하품만 한 번 하니, 그 처녀 민망하고 민망하여 또 개를 보고 말하였다. “멍멍아, 내가 너에게 허황된 말을 할 것 같으면 내가 너의 딸자식이다.”
혼인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쁜 노처녀가 체면 때문에 그 즐거운 마음을 마음껏 표현할 수 없어 화장실로 달려가 그곳을 지키는 개를 불러 ‘나 시집간다! 나 결혼한다고! 정말이라니까!’라고 외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2016년 역대 최저치의 혼인율 보도를 보고 있자니 18세기 후반 정조가 추진한 노총각 노처녀 혼인 이벤트가 떠오른다. 경제적 문제로 결혼을 할 수 없는 현실은 개인이 아닌 사회와 국가적 문제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국가 정책이 돼야 한다. 가정이 번성하고 백성들이 즐거운 것이 태평성대 아니고 무엇일까? 꽃비가 날리고 봄바람 솔솔 부는 봄날, 대한민국의 솔로들은 안녕하신가?
기획전 - 다산 정약용 원본으로 만나다
상설전 - 장서각, 기록문화의 정수
6월 10일까지 (월 ~ 토 9:30~17:30) 장서각 전산실
제민일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서 군영등록의 의미와 가치
내년 제주 4.3 사건 70주년을 앞두고 ‘제주 4.3기록물’을 ‘광주 5.8기록물’과 같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기 위해 제민일보에서 기획특집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등재를 준비하고 있는 장서각 소장 군영등록의 가치와 의미를 소개하고 추후 추진되는 내용을 공유하고자 관련 자료를 제공하고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300여년간 민초의 삶 기록…'치열한 현장'에 가치제주 4·3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8. 군영등록
'군영등록'은 장수나 영웅이 아닌 민초(병사)의 기록으로 애민과 소통으로 일군 공존의 시대정신과 열악한 환경과 처지를 극복해가는 역동성을 품고 있다. 군영등록의 의미를 되새기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과정을 살펴 제주4·3의 미래를 모색한다
△군영등록이란
'군영(軍營)'은 임진왜란과 명·청 교체기 등의 동아시아 국제 정세 변화 속 국가 위기 대처를 위해 새롭게 탄생한 중앙 군대다. 전쟁 후에는 국왕 호위와 도성 방어를 전담했다. 급료를 받는 직업군병의 탄생은 조선왕조의 군제 시스템의 변화를 이끈 전환점이다.
'등록(謄錄)'은 말 그대로 '베껴서 기록한다'는 의미다. 이는 조선왕조만의 독특한 공문서 보존방식으로 각 관청마다 생산된 공문서들을 낱낱이 베껴서 일지형식의 책자로 만든 문서철이다.
군영등록은 각 군영에서 생산한 등록으로 훈련도감과 어영청, 금위영, 어영청, 수어청, 총융청 등의 등록이 주축이 된다.
군사 기밀사항까지도 숨기지 않고 300년간(1625~1894) 지속적으로 기록·보존한 문서철이어서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독보적인 기록물이다.
군영등록은 국내·외 유일본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569책,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120책 등 모두 689책이라는 방대한 분량이 소장돼 있다.
△군영등록의 가치
군영등록은 다양한 가치를 갖는다.
우선 기록유산적 가치를 보면 군영등록은 300년간 지속된 군영 일상 업무기록이다. 군영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설립돼 조선왕조의 군제 시스템뿐 아니라 사회·경제·문화의 동인이 됐다. 군영등록은 장구한 시간 속의 변화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특히 역사 그늘에 가려졌던 군병 집단이 새로운 한양 주민으로 살아간 치열한 삶의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군영등록은 국정기록에서 전혀 접할 수 없는 군병과 하층민의 삶을 깊이 있게 기록했다.
또 300년 동안 변모해간 한양 기록이기도 하다. 도성에서의 군영과 군병 기록은 17~19세기 국왕으로부터 백성까지 공존했던 한양의 지리·문화 지형도 변화 양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세계사적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군영은 전쟁을 위해 설립됐으나 전란 이후에는 도성의 범죄예방과 화재, 호환(虎患), 청계천 범람 등의 자연재해로부터의 민생을 지키는 것이 주임무가 된다. 군영등록은 한마디로 조선 후기 사회의 전쟁·범죄·자연재해로부터 인간 보호를 실천한 기록인 것이다.
조선 왕조 최초 군영인 훈련도감은 조총을 사용하는 포수를 주력군으로 했다. 국가에서는 정책적으로 서양의 귀화인과 표류인을 군영의 교관으로 삼아 총포 생산과 조총 다루는 법 등을 가르치게 했다. 군영은 서양 과학기술을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곳으로 동서 문화 교류의 장이 됐다.
실제 훈국등록에는 박연(벨테브레이) 훈련도감 교관 근무와 하멜의 훈련도감 근무 등의 내용이 남아있다.
17~19세기 군영에서 근무한 직업군병 기록은 역사 속 약자의 일상을 조명할 수 있는 귀종한 자료이다. 300년이란 긴 시간 동안 군병이 주인공이 된 자료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군영등록은 직업군병의 일상생활, 불합리한 제도 개선을 추구한 민(民)의 의식 성장과 그들이 움직여간 사회 변화의 궤적이 잘 드러나 있다.
△군영등록의 기록유산 도전
이처럼 기록유산적·세계사적 가치를 지닌 군영등록은 '세계인의 기록'으로 남기 위해 도전에 나선다.
문화재청은 2017년 세계기록유산 등재 대상 기록물 선정을 위해 지난 2015년 7월20일부터 8월31일까지 대국민 공모를 실시한다. 공모 결과 모두 13건이 접수된다.
이어 2015년 11월17일 진행된 세계기록유산 한국위원회에서 군영등록은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 '4·19혁명 기록물' 등과 함께 후보 4건에 추천된다.
하지만 최종 기록유산 등재 대상에서는 제외되는 아픔을 겪는다. 공모 당시에는 군영등록에 대한 연구를 막 시작, 자체적으로도 자료 내용에 대한 이해와 연구, 홍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심사 과정에서도 '자료의 탈초와 번역 같은 자료 접근성을 용이하게 하고 연구를 심화시켜 많은 사람들이 군영등록이 어떤 자료인지 알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듣는다.
△부족분 보완과 재도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소장 자료 569책의 이미지와 탈초본 DB를 구축하고 번역과 자료 내용을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을 집필해 출간을 준비하는 등 자료의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또 군영등록 연구에 대한 심화의 노력으로 해외 한국학자들에게 자료를 제공해 공동 연구를 추진했으며 연구서 간행도 준비 중이다. 이는 자료 접근성 제고와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에게 군영등록을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홍보의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군영등록은 앞서 실패 사례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세계인의 기록'에 다시 도전하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이는 아직 발걸음도 떼지 못한 제주4·3에 울림을 준다. 섬의 이야기, 제주인의 아픔으로만 남아있는 제주4·3이 세계인의 기록이 되기 위해서는 '확장성'이라는 과제가 남게 됐다.
4·3의 확장성 문제는 4·3 교육 활성화와 유사 사례와의 연대 강화 등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렵게 세상과 마주한 제주4·3이 전국화를 넘어 세계인의 기록으로 인정받을 때 제주는 진정한 평화와 인권의 섬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등재 기록물 이해도 높이는 노력 필요"
[인터뷰] 원창애 장서각 왕실자료연구실 책임연구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서는 기록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창애 장서각 왕실자료연구실 책임연구원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이산가족찾기와 같이 누구나 알고 있는 자료라면 등재 준비가 어렵지 않지만 등재하려는 자료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은 경우에는 홍보에 집중해야 한다"며 이같이 조언했다.
이어 "자료 홍보를 위해서는 자료 접근성을 높이고 연구를 통해서 자료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는 방법도 있으며 전시를 통해서 대중들이 직접 자료를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원 책임연구원은 "군영등록이 방대해 그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군대기록이라는 이유로 사료로서의 가치를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러한 선입견을 깨기 위해서 군영등록의 심화연구, 대중화를 통한 가치 홍보를 확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지난 2015년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때는 '군영등록'에 대한 연구를 막 시작한 시점이라 자체적으로도 자료 내용에 대한 이해와 연구 그리고 홍보가 부족했다"며 "심사과정에서도 자료의 탈초와 번역과 같은 자료 접근성을 용이하게 하고 연구를 심화시켜 많은 사람들이 '군영등록'이 어떠한 자료인지 알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들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군영등록 연구의 심화에 노력했다. 해외 한국학자들에게 자료를 제공해 공동 연구를 추진했으며 연구서 간행도 준비 중"이라며 "자료 접근성 제고와 심화 연구를 통해서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에게 군영등록을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홍보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라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