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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도서관에서 만난 '원칙'

임지영 사진
임지영
장서각 자료보존관리팀 선임사서원

지난 해 11월, 필자는 장서각세계화 사업과 관련한 독일과 영국 출장길에 그곳의 도서관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지면에서는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영국도서관(The British Library) 방문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영국도서관은 1753년 설립된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 도서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98년 런던 St. Pancras에 지금의 도서관 건물이 문을 열었고, 웨스트요크셔 Boston Spa에 문헌배달 서비스(Document Delivery Service)를 위한 별도의 건물을 두고 있다. 잘 알려진 언어 자료만 약 1억5천만 점에 매년 300만 점 이상의 자료가 새로 입수되는 이 거대한 도서관을 단시간에 두루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등 귀한 우리 자료를 열람하고 전시를 관람한 것만으로도 값진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자료를 소장·관리하고 있는 영국도서관 아시아-아프리카 컬렉션에서는 상근자 기준20~25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근무하는 파트타임 직원 등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방대한 자료 양에 비하여 전체 아프리카 국가자료를 단 1명의 직원이 전담하는 등 인력난이 심각하고, 업무량 과다로 한자를 해독할 줄 아는 일본·중국 담당 큐레이터가 서로의 영역을 크게 구분 짓지 않고 서로 도우며 일하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 보니 영국도서관 또한 마냥 이상적인 곳만은 아니구나 싶었다.

인력 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국도서관 큐레이터들이 고문헌자료를 다루는 방식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자료 열람을 원하는 이용자는 반드시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하며, 방문자증을 패용한 후 개별 공간(individual room)에서 열람하도록 안내된다. 자료에“No Photography Allowed”표식이 삽입된 경우에는 촬영이 엄격하게 – 설령 멀리 외국에서 온 해당분야 전문가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 금지된다. 우리 일행이 열람한 자료들은 대개 보관 상자 안에 담겨 있었는데, 보관 상자의 크기나 재질을 자료의 형태적 특성에 따라 달리 제작하고, 열람 과정에서 자료를 옮기고 만지는 일을 모두 큐레이터가 전담하여 이용자의 손길이 닿지 못하게 하는 등 고문헌을 세심하게 관리하는 점이 눈에 띄었다.

방문자 명찰
보관 상자-내부
보관 상자-겉면
촬영 금지 표식

가끔 자료 이용에 있어 원칙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편의를 봐달라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이용자를 만날 때가 있다. 일찍이 랑가나탄이 도서관학 제1법칙에서 천명한 것처럼 “책은 이용하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고문헌은 그 자체가 잘 보존·관리되어야 하는 문화재이기도 하다. 무례한 이용자를 탓하기 이전에 나 자신은 얼마만큼 고문헌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예외 없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지, 자료에 카메라 줄 하나만 닿아도 주의를 촉구하던 영국도서관 큐레이터들을 떠올리며 반성해본다.

yjy@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