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맹자」읽기: 철학적 비유의 두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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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창 일
전통한국연구소 책임연구원

동양철학을 처음 시작할 때 필로로지(philology, 어학)를 습득하기 위해 「맹자(孟子)」에 입문하는 경우가 많다. 「노자(老子)」나 「장자(莊子)」를 배울 때도 유가(儒家)의 경전인 「맹자」를 통해서 철학의 길에 들어선다. 한문의 어법을 배우는데 이러저러한 여러 장점이 있다는 관례 때문이다. 그런데 ‘성인의 말씀’을 음미하기 보다는 한문의 어법을 배우는데 골몰해져서 정작 중요한 내용을 소홀하게 지나치고는 한다.

동서양 철학의 역사에는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 되어 왔던 고사(故事) 들이 즐비하다. 이 가운데 플라톤의 ‘동굴 비유’(「국가론」)는 실재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 사유의 시원이었고, 이로부터 이데아(idea)라는 참된 세계와 이를 불완전하게 모사하는 현실세계가 대비되는 철학의 구도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구도는 신학에 전승되고, 근대세계에서 본체계와 현상계의 범주로 계승되어 지금까지 영향력을 지속하고 있다. 전승된 철학적 사유에 도전하는 현대의 철학은 서양철학의 역사를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고 한 비판할 정도로 동굴의 고사는 서양의 철학적 사유의 원형이었다.

동양에도 철학적 사유의 원형이 되는 고사가 「맹자」에 등장한다. ‘유자입정(孺子入井, 어린 아이가 우물에 막 빠지려함)의 비유’(「공손추상(公孫丑上)」)이다. 맹자는 이 비유를 들어서, ‘사람은 다 사람에게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런 마음은 타고난 것이어서, 잘 보존하고 키워나가면 인애(仁愛)의 덕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입론이다. 그런데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구하려는 마음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 즉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사유가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즉각적이고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감정이라는 것이 특별하다. 이 감정은 현대어로 바꾸자면 동정심이나 공감을 가리킨다. 맹자는 이 동정심이나 공감은 인간에게서 확인할 수는 있으나 매우 미약한 단서로 존재하니, 잘 보존하고 가꾸어야, 인애의 덕을 가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에 그렇지 못하면 짐승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러한 철학적 전승은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에 이르러 사칠론(四七論)의 철학적 논의로 전개된다. 이 논의에는 인간의 이해는 감정을 최종 기저로 하여 시작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 고사는 지성과 감성을 날카롭게 구분하고 지성을 우위로 놓는 철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서양에서 동정심이나 공감과 같은 말은 감성을 억압하고 이성을 절대시하는 서양의 지적 전통 탓에 오랜 시간 동안 철학적 사색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유자입정의 비유는 이것이 물구나무 선 전통이며, 독단의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미증유의 경험을 진행하고 있는 지금, 이러한 상이한 지적 전통에서 어느 것이 현재와 미래의 철학에 기여할 것인가를 진단하는 것은 철학의 급선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감정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미 진행했던 한국철학의 전통에 비추어보자면 의무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수세기 동안은 동굴의 비유가 유자입정의 비유를 압도적으로 능가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최근 과학의 진영에서는 유자입정의 철학적 자산이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증거들이 출현하고 있다. 뇌과학에서 거울뉴런(mirror neuron)의 존재는 공감의 신경생리학적 증거가 되며, 진화생물학은 지성보다 더 근저에 놓인 감정의 기제로부터 인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는 증거를 내놓고 있다.

「맹자」는 인간이 지성보다 더 오래되고 근원적인 바탕이 되는 감정에서부터 인간됨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의 단서를 보여주었다. 인간에게는 동물과 공유하는 일차적(저차적) 감정들이 있음에도, 자신의 존재처럼 타인과 세계를 공감하는 이차적(고차적) 감정이 있다. 이는 인간의 단계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감정은 인간세계의 화해(和諧)를 가져다주는 인애의 덕으로 자라나고, 더나가 자연세계의 산천초목의 존재를 깊이 느끼고 공감하게 된다는 이른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약속한다. 천인합일이 신비주의적인 몽환적 언어가 아니라,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인애를 가리킨다는 생각을 다시 음미해야 비로소 우리의 「맹자」 읽기가 끝나지나 않을까?

gulgun@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