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자료 산책

천원(天園)이 상상한 어린이의 상(像), ‘금방울’

박하늘 사진
박하늘
한국학도서관 문헌정보팀 정사서원

첫 여름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1921년 6월 9일. 천원(天園) 오천석(吳天錫, 1901-1987)은 제물포 우각촌에서 다음과 같은 서문(序文)을 적었다.


장미갓치 아름답고、수졍갓치 맑고、비달기의가슴갓치 보드랍든、어렷슬때의 령을 파뭇은 조고만 무덤에 드리기위하야 이 『금방울』을 짯습니다。저는、밤깊허 사방이 고요할때에 달발근 창기슬에 호을노 안저서 이 『금방울』을보며 그리운 달듸단 어렷슬때를 추억하며 울으려 합니다。(후략)


그는 이렇게 장미 같고 수정 같고 비둘기의 가슴 같은,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금방울』을 편찬하였다. 금방울은 현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동화집이자 근대동화집으로 1921년 8월 광익서관(廣益書館)에서 발행되었다. 그는 ‘얼마만큼이나 한 개의 존귀한 생명의 자람을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가슴이 뛰었다는 편찬 감회를 전하였는데, 당시 출판된 금방울의 초판본이 우리 도서관 안춘근 문고[안 813.8 오83ㄱ]에 소장되어 있다. 5월 5일 어린이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오천석의 번역동화집 금방울을 소개하고자 한다.


금방울은 안데르센의 동화 4편을 포함한 여러 외국동화를 골라 번역한 책이다. 신연활자(新鉛活字)로 인출되었으며 총 170면에 10편의 동화를 실었다. 표지에는 ‘금방울’이라는 표제와 오천석의 호(號) ‘천원[텬원]’, 발행처인 ‘광익서관’이 인쇄되어 있으며, 어린 아이 두 명과 방울이 든 바구니가 그려진 채색 삽화가 인상적이다. 표제지에는 ‘동화집’이라고 하여 책의 성격을 드러내었고 오천원 ‘편(編)’이라는 표현을 통해 창작동화집이 아님을 나타내었다. 표제지 뒤에는 서문 격인 ‘『금방울』 머리에’가 있으며 차례를 ‘속살’이라 표기한 점이 특징적이다. 본문에는 안데르센의 동화 <길동무>, <어린 인어 아씨의 죽음>, <앨리쓰 공주>, <어린 석냥파리 처녀>를 비롯한 <어린 음악사>, <귀공자>, <소녀 십자군>, <눈물 먹히는 프라스코비의 니야기>, <소년 용사의 최후>, <빛나는 훈장>이 수록되었다

표지

표지

표제지

표제지

차례

차례

오천석은 이솝의 우화나 그림(Grimm)의 전래동화 번역이 일반적이었던 1920년대 초에 금방울을 통해 안데르센의 예술동화 4편과 외국의 창작동화를 선보였다. 그는 민담의 성격이 강한 외국의 옛이야기와 달리 안데르센의 작품을 ‘예술동화’로 차별화하여 인식하였고, 나머지 6편 역시 창작동화만을 수록하였다. 따라서 금방울에서는 1920년대까지 동화의 주된 문법으로 사용되던 서두의 ‘옛날 옛날에~’와 같은 상투적인 시작을 볼 수 없고, 배경과 인물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문장과 섬세한 비유가 돋보인다.

더불어 그는 동화를 통해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옹호하고 주인공에게 순진무구하고 깨끗한 어린아이의 이미지를 부여하였다. 주인공의 외모와 심성을 ‘꽃과 같이 아름다운’, ‘눈과 같이 깨끗한’, ‘철없는 사랑스러운 아이’로 묘사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본문의 삽화에서는 신체적으로 성적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순수한 어린아이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였다.

앨리쓰 공주

앨리쓰 공주

어린 음악사

어린 음악사

소녀 십자군

소녀 십자군

이것은 어린이를 ‘어린 어른’으로 규정하고 그들에게도 성인의 규범을 엄격하게 적용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조숙한 모습으로 표현된 1910년대 아동 잡지의 어린이 이미지와 확연히 대조되는 모습이다. 이렇게 오천석은 어린이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순수한 동심과 정서를 키울 수 있는 이전과 전혀 다른 감각의 문학 형식을 이끌어 냈고, 아직 ‘어린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시점에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근대적인 어린이 상(像)을 제시하였다. 그의 동화집 속에 표현된 어린이의 모습이 바로 그가 상상하고 기대한 어린이의 상이었다. 그의 번역동화집은 이후 펼쳐진 방정환의 아동문학 보급 운동과 어린이 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이 조그만 거둠을 배달의 어린 동무에게 드립니다'


금방울의 본문 앞에 실린 오천석의 헌사(獻辭)이다. 근대를 넘어 현대의 어린이관이 형성된 이후, 그 혜택을 당연하게 누리며 자란 한 명의 성인으로서 천원을 비롯한 여러 아동 문학가와 인권 운동가들에게 뒤늦은 감사함을 전한다.


참고문헌
오천석, 『금방울』, 광익서관, 1921.
이재철, 『한국현대아동문학사』, 일지사, 1978.
조은숙, 『한국아동문학의 형성』, 소명출판, 2009.
염희경, 「일제 강점기 번역・번안 동화 앤솔리지의 탄생과 번역의 상상력(2) : 기독교 계열의 번역 동화 앤솔러지를 중심으로」, 『아동청소년문학연구』 11, 2012.
염희경, 「근대 어린이 이미지의 발견과 번역・번안동화집」, 『현대문학의 연구』 62, 2017.
한국민족문화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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