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조선시대 전염병과 사회적 거리두기

혀원영 사진
허원영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연구원

지난해 말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로 인하여 전세계적인 재난상황이 초래되고 있다. 항생물질의 개발이나 예방 백신의 개발 등 의학의 발달이 영양과 위생의 개선과 함께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한때는 우리 인류가 전염병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종 전염병은 꾸준히 출현해왔고, 그 중 몇몇은 심각한 위협을 초래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전염병을 의미하는 한자 ‘역(疫)’을 ‘백성들이 모두 앓는 것[民皆疾也]’이라고 풀이한다. 한편 『석명(釋名)』에서는 ‘역(疫)은 역(役)이다.’라고 하여 요역(徭役)과 같은 집단적 부역과 연관 짓기도 한다. 대규모 요역의 경우 전국의 다양한 곳에서 사람들이 모였고, 부실한 영양과 위생상태 속에서 집단적으로 생활하게 됨으로써 전염병의 발발과 전파가 급속도로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또한 이들이 다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됨에 따라 그 전파가 지역을 넘어가며 확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


이상기후 역시 예로부터 전염병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허준(許浚 1539~1615)은 『동의보감(東醫寶鑑)』과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에서 유행병의 원인으로 “봄에는 따뜻해야 하는데 도리어 춥거나, 여름에는 더워야 하는데 도리어 서늘하거나, 가을에는 서늘해야 하는데 도리어 덥거나, 겨울에는 추워야 하는데 도리어 따뜻하여 그 시기에 맞지 않은 기(氣)로 인해서 생긴다.”고 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의 기록들을 봐도 겨울에 꽃이 피었다거나, 따뜻하여 눈이 내리지 않았다는 등의 이상기후에 이어 전염병이 창궐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상기후는 그 자체로 기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사람들의 영양 상태를 위태롭게 했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유망이 초래되면서 전염병의 발발과 지역을 넘나드는 유행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동절기의 이상고온 현상은 전염병을 옮기는 매개체의 월동 및 서식지 확장을 야기해 바이러스 진균의 증식을 연장시키는 결과까지 이어졌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북반구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지난 겨울에 역대급으로 따뜻했고, 세계 각지에서 ‘관측 이래 최초’ 또는 ‘관측 이래 최고 온도’라는 표현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 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의 3개월은 역대 겨울 평균기온 최고와 적설량 최저를 기록했다. 지난 해 말에 시작된 코로나19가 해를 넘긴 지금까지도 수그러들지 않고 전파력을 유지하는 데에는 이와 같은 전 세계적 이상고온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행인 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영양과 위생, 의료가 충분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못했던 1821~1822년(순조21~22)의 조선은 전국적인 콜레라의 유행으로 인하여 “경재(卿宰) 이상 사망자가 10여 명이었고, 여느 관료나 백성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서울과 지방의 사망자까지 합하면 모두 수십 만여 명이나”(『조선왕조실록』 1821년 8월 22일)되고, “굶주린 백성들이 살고자 식구를 거느리고 살길을 찾고 있는데, 지금 살아서는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죽어서는 묻지도 못하여 그냥 시체가 나뒹굴고 쌓이는”(『조선왕조실록』 1822년 4월 28일) 상황에 직면했다.

코로나19의 범지구적 전파와 대규모 인명 피해를 초래한 배경이 된 것은 인구의 증가와 도시화, 그리고 교통의 발달과 세계화일 것이다. 현대화된 사회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치료약과 백신이 없는 전염성이 강한 전염병의 확산을 억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대두된일상의 변화가 이른바 ‘사회적 거리두기’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새로운 것은 아니며, 전염병을 대처하는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전염병이 발생하면 일상의 많은 활동을 자제하며 사람들 간의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조극선(趙克善 1595~1658)의 일기인 『인재일록(忍齋日錄)』에도 이와 관련한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다. 1621년(광해군13)에서 이듬해 초까지의 기간에 극선 일가가 거주하는 덕산현(현 충청남도 예산) 일대에는 홍역 등 전염병이 잇달아 창궐했다. 늙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있던 조극선 일가는 전염병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10개월이나 거주했다. 그리고 많은 활동을 줄여나갔는데, 여기에는 심지어 제사와 아버지의 생신과 같은 중차대한 일들도 포함되었다. 이 시간을 지나면서 조극선 일가는 노비를 포함하여 7명의 식솔을 잃었고, 말도 3마리나 죽어나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하여 1년이 넘도록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엄혹한 전염병의 시절을 견뎌 나갔다.


조극선의 일기, 『인재일록(忍齋日錄)』과 『야곡일록(冶谷日錄)』

조극선의 일기, 『인재일록(忍齋日錄)』과 『야곡일록(冶谷日錄)』


이러한 모습은 전염병을 대처하는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이문건(李文楗 1494~1567) 역시 1556년(명종11) 봄에서 여름 사이에 홍역이 퍼지자 『양아록(養兒錄)』에 ‘크게는 제사를 멈추고 작은 일로는 길쌈을 그만두었다.’고 기록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속에 홍역은 2~3개월 만에 사그라졌고, 다행히도 이문건 일가는 병마를 이겨 낼 수 있었다. 어린 종으로부터 시작하여 2대 독자인 친손자를 비롯한 일가의 8명이 홍역에 걸렸지만 다행히도 모두 건강해졌던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코로나19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 이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으며,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여전히 암흑 속을 헤매고 있다. 어려운 시기이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여전히 필요한 시점이다.



hon0418@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