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책 저런 얘기

개화기 서포와 서적상들

문은희 사진
문은희
한국학도서관 문헌정보팀 책임사서원

일제강점기에는 젊은 날의 희생을 감수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무명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갖은 고난 속에서도 조선인들의 애국계몽운동과 신문화 보급에 앞장선 주역들도 여기에 빠질 수 없다. 그들 중에는 오늘날 출판사의 기원이 되는 서포(근대식 서점)와 숨겨진 애국자라 불리는 개화기 서적상들을 들 수 있다. 검열난, 원고난, 재정난 등의 어려운 가운데서도 개화기 서포는 당대 지식인들이 주도한 애국계몽 운동과 함께 근대식 출판, 인쇄기술의 보급에 귀중한 공헌을 남겼다. 이와 관련하여 개화기 출판을 주도했던 서적상들과 서포를 일부 소개해 본다.


한국의 근대 인쇄 출판은 고종의 명으로 설치된 박문국(1883)과 민영인쇄소인 광인사(1884)를 시작으로 막이 열리게 된다. 이들이 간행된 서적들은 대부분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인 『농정촬요』를 비롯하여 『만국정표』, 『신라김씨선원록』, 『각국약장합편』1), 등과 광인사에서 최초로 발간한 『충효경집주합벽』, 추금 강위의 시집 『고환당수초』2)등의 자료가 발행되었다. 이때만 해도 서양의 연활자와 인쇄기가 조선에 수입되면서 서적들은 전통적이고, 재래의 장정 방식이었다. 이들 자료는 개화기 자료들의 표본이 될 뿐 아니라 그 시기 출판 현황이나 출판 활동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특히 『농정촬요』는 박문국의 회계주임을 지낸 정병하가 엮은 3권 1책의 작물과 토양 비료에 관한 농서인데, 흔히 1895년에 일본에서 출판한 유길준의 『서유견문』이 최초로 알려져 왔으나, 그 보다 9년 전인 1886년 5월에 나온 이 책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 출판물로 확인되어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3)


박문국과 광인사에 이어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간 인쇄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이들 자료들은 우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문학, 잡지, 애국계몽서, 교과서 등 다채로운 서적들이 그 시대를 투영하고 있다.

서포를 운영한 개화기 서적상들은 신문화 운동의 주요한 일익을 담당하여 신문과 잡지 보급, 교과서와 계몽서적을 출판하는 등 한글 사용을 확대하여 일반 대중에게도 쉽게 접할 수 서적을 간행하였다. 대표적인 서적상으로 광학서포의 김상만, 회동서관의 고유상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가장 왕성한 출판 활동을 벌이는 동시에 상업주의에 앞서 국권 회복과 민중의 계몽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광학서포의 전신은 김상만책사로 1900년경에 신문광고란에 등장한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통감부가 판매를 금지한 책을 가장 많이 낸 출판사로 알려져 있고, 이해조의 『자유종』을 비롯하여 신채호의 『이태리건국삼걸전』과 『을지문덕』,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등 역사와 지리, 교과서를 비롯해 개화계몽과 교육에 필요한 도서를 주로 발행하였다. 특히 서적상 김상만은 애국계몽 운동단체인 ‘기호흥학회’ 회원이었으며, 한일합방 전까지 가장 많은 수의 계몽서적을 출판하여 민족의식 고취시켰고, 한일합방 전 사상 탄압이 강화되면서 압수와 금서 처분으로 타격을 받아 몰락하였다.

1897년 고제홍 서사를 이어받아 고유상이 세운 서포가 회동서관이다. 조선의 문화·역사·전통 등 과거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서적상으로 평가된다. 고유상은 가장 규모가 큰 민족계 출판서적상으로 최고의 납세자로 기록되어 있고, 고대소설을 제외한 모든 출판물에 인세를 지불한 선례를 남겼다고 한다. 당시 종두법을 도입한 개화 지식인 지석영을 끌여들어 『자전석요』(지석영, 1909)라는 옥편을 출판하여 일제강점기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냈다. 사진에 보듯이 무장한 헌병이 서점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상황에서도 위인전과 역사서, 번역서 등을 꾸준히 간행했다. 쥘 베른의 과학소설을 번역한 『철세계』, 지석영의 『자전석요』로 큰 성공을 거뒀으며, 한용운의 『님의침묵』 초판본, 이광수의 『무정』, 대중을 위한 십전소설을 발행하여 국권 상실의 위기에 계몽 기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광학서포

광학서포

회동서관

회동서관

원고의 검열과 불허가 처분을 받으며 때로는 형무소까지 의식하면서 악전고투를 해야했던 서포와 서적상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끼친 문화의 전달자였다. 또한, 1910년 한일합방을 맞으며 일제는 신문지법, 출판법 공포로 애국 계몽적 서적들을 모두 압수하거나 발매금지 까지 시켰다. 그러한 배경에서도 피어난 민족수난의 산 증거인 근대 인쇄출판물들은 암울한 시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역사적 산물이자 보석 같은 존재들이다.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남은 책 그리고 개화기 서적상들을 통해 ‘오래된 미래’를 그려본다.




1)『農政撮要』 C6A 6, 1886, 『萬國政表』 K2-322, 1886, 『新羅金氏璿源錄』 B10A 5, 1887, 『各國約章合編』 K2-3462, 1890
2)『忠孝經集註合壁』 A8 1, 1884. 『古歡堂收草』 D3B 174~5, 1885.
3)청주고인쇄박물관, 『1894 갑오개혁의 꿈』, 청주고인쇄박물관, 2014. p.9

heyaff@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