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리는 기록유산

묵묵하기

-한지장, 신현세 선생님-

김나형 사진
김나형
장서각 자료보존관리팀 정전문위원

지류(紙類)문화재 보존처리 과정에서 한지(韓紙)는 여러 용도로 사용된다. 그림을 배접할 때, 그리고 손상된 부분의 메움 작업이 필요할 때 등 한지는 지류문화재 보존처리에서 복원재료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배접하는 사진

그림1)배접하는 모습

그림을 배접할 때 사용하는 한지는 일단 균일해야 한다. 배접은 지지기반이 약한 글씨나 그림의 뒷면에 풀과 종이로 튼튼하게 해주는 작업이기 때문에 울퉁불퉁하고 섬유가 여기저기 뭉쳐있는 종이로 배접을 하면 그 글씨나 그림 역시 울퉁불퉁 해지고 시간이 지나면 바로 그 부분에서 손상이 발생한다. 인류의 제지술은 면을 균일하게 하기 위한 발전 과정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종이의 면을 균일하게 하는 일은 중요하고, 또 하기 힘든 기술이다. 하지만 한지는 수록지(手漉紙)이기 때문에 특성상 A4 종이처럼 면을 균일하게 만들기가 힘들다.

손상된 부분의 메움 작업이 필요할 때 사용하는 종이는 균일해야 하는 조건 외에 한가지 더 중요한 조건이 있다. 메움작업 하는 대상자료의 특징과 유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종이의 섬유종류, 섬유길이, 평량, 밀도, 두께, 모양이다.


종이 발을 조사하는 모습

그림2)종이 발을 조사하는 모습

닥, 안피, 대나무 등 섬유종류마다 온습도에 변화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대상문화재의 지질을 조사하여 같은 종이를 사용해야 서로 물리적인 힘이 비슷해진다. 평량과 밀도, 두께 역시 대상문화재와 물리적인 힘을 맞추어주는 부분에서 필요한 특징이다. 그리고 종이 모양은 수록지의 특징인 종이를 뜰 때 사용하는 발의 모양이다. 예를 들면 조선초에는 갈대발로 뜬 종이가 많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특징을 메움종이를 제작할 때 복원하여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요구사항을 40년 넘게 만족시키고 양질의 한지를 만드는 분이 계시다. 경남 의령의 신현세 선생님이다. 신현세 선생님은 국내 지류문화재를 보존처리하는 기관에서 사용하는 거의 대부분의 복원용 한지 제작을 맡고 계신다.


경남 의령 신현세 선생님

그림3)경남 의령 신현세 선생님

공예용이나 서예, 동양화의 작품용지에 비해 보존처리에 사용하는 한지는 위에서 이야기한 세밀한 사양을 요구하기 때문에 국내 보존처리 기관에서 예산을 투자해 사용하는 신현세 선생님의 한지는 이러한 까다로운 조건의 높은 사양을 충족시킨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에도 불구하고 신현세 선생님의 한지 제작 기술은 매번 중요유형문화재 심사에서 탈락하였다. 국내 제지공학 전문가들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분석데이터를 내세우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보다 본인의 한지 제작 실무기술이 맞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어려운 요구조건이 아니였음에도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는 한지 기술을 바꾸지 않으셨다. 사실 또 한편으로는 실무경험이 없는 제지공학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전통기술이 유형문화재 한지장에게 맞는 전통기술의 요건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여러 해 선생님을 보면서 장인의 삶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알게 되었고, 고된 노력 위에 세워진 선생님의 자부심과 선생님의 한결 같은 한지를 보면 마음이 숙연해졌기 때문이다.


ICPAL에서 인증서 전달식

ICPAL에서 진행된 인증서 전달식

비록 국내에서 유형문화재 한지장이 되지 못했지만, 작년 말 문화재 보존과학이 시작된 이탈리아에서 뜻밖의 좋은 소식이 왔다. 신현세 선생님이 제작한 한지 3종이 국립기록유산보존복원중앙연구소(ICPAL: Istituto centrale per il restauro e la conservazione del patrimonio archivistico e librario)에서 문화재 복원에 적합한 재료라는 인증을 받은 것이다. 이에 놀란 국내 기관들은 이 흐름을 타고자 앞다투어 이탈리아 기관들과 협력사업을 추진했다. 신현세 선생님의 한지는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등 이탈리아 중요문화재의 복원 재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어려운 길을 묵묵히 지켜내신 한지장이 계셔서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작은 일에 흔들렸던 내 자신을 돌아보며, 이전보다 조금씩 내가 일하는 분야의 여건이 좋아지고 있다고 믿고 일하고 싶다.

nna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