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일반 청미

김태환 사진
김태환
한국학정보화실 책임연구원

달은 하늘 한가운데로 돋고,
바람은 물낯을 스쳐 오는 제,
한가지로 맑은 뜻,

아는 이 자못 적을 듯.
月到天心處, 風來水面時,
一般清意味, 料得少人知. - 邵雍, 清夜吟


소옹이 말하는 한가지로 맑은 뜻이란 때마침 하늘 한가운데로 돋아 빛나는 달의 달빛과 물낯을 스쳐 오는 바람이 맑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마주한 나의 마음이 또한 저들과 한가지로 맑다는 것이다. 사물의 특정한 정황(情況)에 말미암아 생기는 흥취(興趣)를 말하되, 소옹은 이 흥취를 나에게 있는 이것으로만 말하지 않고 저쪽에 있는 저것으로도 말했다. 자신의 흥취와 대상의 흥취가 한가지로 같다고 말하는 소옹의 저 시경(詩境)은 이것을 아는 이가 오히려 끊이지 않았다.


무욕(無欲)ㆍ자득(自得)의 인품을 지닌 사람이 청명(淸明)ㆍ고원(高遠)한 마음으로 광풍(光風)ㆍ제월(霽月)의 때를 한가로이 맞이하매, 저절로 경물(景物)과 정의(情意)가 한데 모이고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이 하나가 되어 흥취가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니, 정결(淨潔)ㆍ정미(精微)ㆍ종용(從容)ㆍ쇄락(灑落)한 기상은 말로 나타내기 어려울 바이나, 즐거움은 또한 끝이 없을 것이니, 강절(康節)이 말한 것은 다만 이러한 뜻일 뿐이다. (李滉, 答李宏仲, 退溪先生文集 36-19)


경물(景物)과 정의(情意)가 저절로 한데 모이고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이 저절로 하나가 되는 경지라면, 이것은 내외가 따로 없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라고 할 수 있으니, 이러한 경지에서 생기는 흥취는 실제로 그것이 자기 자신의 것인지 사물 자체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바람이 솔잎에 스치는 동안 내내 솔바람소리가 울려 나오되 그것이 도무지 솔잎에서 나는지 바람에서 나는지 분간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다.


요즈음 계상(溪上)의 서실에서 지내는 터인데, 밤을 이어 달빛이 너무 맑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잠이 없게 만든다. 오늘은 우연히 하산(霞山)에 갔더니, 사경(士敬)이 찾아와 ‘월천(月川)의 야경(夜景)이 마침 의(意)와 더불어 하나로 모여 매우 흐뭇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옛 사람들의 이른바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光霽]은 본디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달빛과 바람을 깊도록 느껴 마지않다가, 돌아와 절구(絶句) 하나를 지어 사경에게 보낸다. (李滉, 七月旣望序, 退溪先生文集 3-55)

계당(溪堂)에 밝은 달이 천당(川堂)도 밝고,
어젯밤에 맑던 바람이 오늘밤도 맑다.
이밖에 또 한 가지 맑고 밝은 곳이 따로 있으니,
우리가 어쩌면 명성(明誠)을 몸소 밝힐꼬?
溪堂月白川堂白, 今夜風淸昨夜淸.
別有一般光霽處, 吾儕安得驗明誠. - 李滉, 七月旣望


퇴계가 그의 64세 첫가을에 월천의 처소로 보낸 시와 그 사연이다. 보름을 지나던 당시의 달빛은 퇴계가 보아도 밝았고, 월천이 보아도 밝았다. 바람도 맑았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월천은 이것을 몹시 아름답게 여기고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한 나머지 부용봉(芙蓉峰)에서 자하봉(紫霞峰)까지 십리가 훨씬 넘는 길을 훌쩍 날아와 앉았다. 월천의 이러한 감흥은 당연히 미적 만족의 가장 지극한 것에 속한다. 퇴계도 그에 못잖은 감흥에 밤을 이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의 달빛과 바람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한가지로 밝고 맑았다. 퇴계와 월천은 또한 그것을 한가지로 흐뭇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지각(知覺)에 한해서 선언하는 때만 사물의 객관성과 더불어 필연적 관련을 지닌다. 달빛과 바람이 아무리 밝고 맑아도 이것을 느껴서 깨닫는 우리의 지각이 아니면 저들은 마침내 밝고 맑도록 지니는 자체의 형식과 실질을 드러내지 못한다. 사물의 드러남은 그것이 뚜렷할수록 우리의 지각도 그만큼 뚜렷한 깨달음이 있음을 뜻한다. 요컨대 모든 물성(物性)의 드러남은 또한 인성(人性)의 깨달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니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은 반드시 인성의 맑고 밝은 것과 하나다.


소옹과 퇴계의 시경이 보여 주는 물아일체의 흥취는 특히 무정물로부터 그 유정함을 느끼는 경계에서 나왔다. 따라서 그 흥취라는 것은 지극히 담박할 뿐만 아니라 미묘한 데서 그친다. 이러한 흥취가 자연 사물의 흥취와 더불어 한가지로 같다니, 좀처럼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래와 같이 유정물로부터 그 유정함을 느끼는 경계에서 말하는 바라면 그 의미를 조금은 수월히 납득할 듯싶다.


요즈음 내가 새집으로 옮겨 가면서 집에 수탉이 있어 먼저 홰부터 옮겼더니, 녀석이 아무리 쫓아내어도 자꾸만 옛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매 쫓던 아이도 성이 나서 마음을 바꾸어 먹고는 보자마자 죽였다. 또 누렁이가 있어 그냥 두고 데려오지 않았더니, 이놈은 문득 뒤따라 와서는 밤에 쫓아 보내면 아침에 다시 그리하였다. 그러자 아이가 이것도 꺼려서 죽였다. 아아, 닭이며 개는 하찮은 짐승이로되, 하나는 옛 터전을 그리워하고 하나는 제 주인을 그리워하는 탓으로 모두 죽음을 맞았으니, 참으로 슬퍼할 만하다. (李堣, 哀二畜序, 松齋詩集 2-8)


여기서 닭과 개가 보여 주는 감정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향수ㆍ연모와 더불어 동일한 성질의 것이다. 이것은 문화(文化)의 소산이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사람은 누구든 그것을 모두 느껴서 고루 가지되, 닭은 옛 터전에 대한 향수만 가졌고, 개는 옛 주인에 대한 연모만 가진다. 하나는 꽉 막힌 일부를 지니고 하나는 탁 트인 전체를 지니는 차이다. 이것은 유무(有無)의 차이가 아니다. 여타의 자연 사물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렇다.


인성과 물성에 어찌 틈이 있으랴?
트이고 막힘은 밝고 어두움에 말미암을 뿐이다.
막힌 것을 열리게 할 수는 없지만,
치우친 곳이라도 천리는 오히려 지닌다.

人物性豈間, 通塞由明昏.
塞者不可開, 偏處天猶存. - 金麟厚, 送子膺


사물의 기품(氣稟)이 다르면 부여된 바의 성품(性稟)도 다르듯, 성품이 다르면 촉발되어 나오는 감정도 희미하고 뚜렷하고 한 정도가 저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가 목석(木石)과 같은 사물을 가리켜 감정이 없다고 한다면, 이러한 경우의 없다는 것은 지극히 희미하여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일 뿐이지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다. 희노(喜怒)가 바르지 못하고 애락(哀樂)이 치우칠 바에는, 차라리 이렇게 지극히 희미하여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이 더 나았을 일인지도 모른다.


인품이 아닌 것을 인두겁이라고 이른다. 기품과 성품이 서로 판이할 때 하는 말이다. 인두겁이 불편한 사람이 있다. 구태여 인두겁이 아니라도 풍류월성(風流月聲)으로 한 세상 스치는 동안 어디를 간들 흐뭇하지 않은 일이 없는 요산수(樂山水)의 취미는 여기에 가깝다. 그런가 하면, 인두겁이라도 뒤집어 쓴 것이 무척 다행인 이들도 있다. 오장(五臟)과 육부(六腑)를 짐승만도 못하게 가꾸는 무리다. 강단과 학회의 민머리 가운데도 보인다. 이러매 저도 모르게 한숨을 짓는다. 천도(天道)는 무심한 것이라, 다니지 않아도 이르고, 서둘지 않아도 빠르다.


suri4w@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