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조선시대의 위장전입

허원영 사진
허원영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연구원

장관 등 고위공직자들의 국회청문회를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제가 위장전입이다. 1990년도 재개발지역 투기를 위한 위장전입자들을 구속한 것이 위장전입을 처벌한 첫 사례였고, 이후 ‘위장전입=부동산 투기’로 인식되며 고위공직자 등 공인들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최근에는 부동산 투기뿐 아니라 자녀를 원하는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한 맹모·맹부들의 위장전입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되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다양한 이유로 저질러지는 위장전입은 그로 인한 피해가 직접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으며, 단속도 쉽지 않기 때문에 불법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경각심도 높지 않고 일상 속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위장전입은 조선 후기에도 문제가 되었다. 조선은 현대의 주민등록제도에 대응하는 호적제도를 운영하였다. 조선은 매 3년마다 전국적으로 호적을 작성하였으며, 모든 백성은 자신이 거주하는 곳의 호적에 입적해야만 했다. 국가는 이를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으며, 백성들 역시 입적을 통하여 제반 법적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벗어날 경우의 달콤한 과실의 유혹 때문에, 혹은 법적 권리보다 국가에 대한 의무가 가혹한 현실 때문에 호적제도의 문란과 위장전입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1736년 4월, 영조는 전 해에 태어난 늦둥이 왕자인 사도세자 이선을 세자로 책봉하고 이를 축하하는 특별 과거시험인 책례경과정시(冊禮慶科庭試)를 행하여 15인을 뽑았다. 그런데 그 중 지방민이 4명에 불과한 것을 알고는 경사를 전국의 백성들과 함께하고자 지방의 선비만을 대상으로 후정시(後庭試)를 개최하여 다시 10인을 뽑았다. 그런데 여기서 1등과 2등으로 뽑힌 광주(廣州)의 홍계만과 개성의 김태검의 합격이 취소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합격자를 대상으로 지난 세 식년의 호적을 조사한 결과, 두 사람의 실 거주지가 서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즉 홍계만과 김태검은 지방으로 위장전입을 하여 과거에 응시, 합격했던 것이다.


함경도 지방의 과거시험_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함경도 지방의 과거시험_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사례에서 보듯 조선시대 양반들이 위장전입을 한 중요한 이유는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은 3년에 한 번씩 전국적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이 정기시는 전국의 응시자를 대상으로 각각 초장·중장·종장으로 나누어진 초시와 복시의 과정을 거쳐야 합격에 나아갈 수 있었다. 반면 나라의 경사와 같은 이유로 부정기적으로 치러지는 별시는 한 번의 시험으로 합격이 판가름 났고, 앞의 사례와 같이 응시자격을 제한하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일단 응시를 하면 합격하기가 정기시에 비해 수월하였다. 따라서 많은 과거 응시자들이 별시를 선호하였고, 특정 지방으로의 위장전입은 별시를 통하여 과거에 합격하고자 하는 욕망이 불법행위로 나타난 것이었다.


특히 평안도와 함경도 및 강화와 제주 등 국방의 요충지인 지방에서 설행되는 별과의 경우는 더 심했다. 1727년에는 제주도에서 실시한 과거에 합격한 이귀제를 탈락시킨 일이 있었는데, 호적을 검토한 결과 제주와 홍산에 중첩하여 입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주 등지의 별과는 변방의 백성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실시하였기에, 해당 지역의 유생으로 응시를 엄격히 제한하였다. 따라서 응시자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아니라, 변방의 특성상 교육과 학문적 성취도 높지 않았다. 때문에 경쟁이 심한 지역의 유생들이 불법을 감수하고라도 이들 지역으로의 위장전입을 통하여 과거합격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위장전입이 법을 어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이 지속적으로 이를 시도하였던 것은 발각 및 처벌의 위험성에 비해 그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었다. 실제 앞의 사건들에 대한 처벌을 살펴보아도, 합격을 취소한 것 외에 일정기간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는 정도의 처벌이 고작이었다.


위장전입은 양반들의 전유물만은 아니었으며, 일반 백성들의 위장전입과 이로 인한 사회문제도 발생하였다. 일반 백성들의 위장전입은 무거운 세금과 부역을 피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으로, 대체로는 인접 고을로 위장전입함으로써 세금과 부역의 부담을 줄이고자 시도되었다. 특히 이웃한 고을임에도 세금과 부역의 차이가 많고, 역의 고충이 심한 곳에서 주로 발생하였다.


제주도에서는 이같은 위장전입이 18세기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당시의 제주도는 제주 3읍이라 하여 북쪽에 제주목이 있었고 남쪽에 대정현과 정의현이 위치해 있었다. 제주는 바다 방어의 요충지이자, 조선의 목장이었고, 제주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산물 등으로 인하여 육지에 비해 매우 무거운 역들이 주민들에게 부과되고 있었다. 특히 제주목에 비해 작은 고을인 대정현과 정의현의 주민들은 무거운 역을 짊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제주목과의 접경지 주민들은 이를 피하여 제주목에 위장전입을 도모하곤 하였다. 이를 통해 제주목의 일반 군역을 수행하고, 실제 거주지에서 부과되는 목장의 일을 하는 목자나 봉수를 지키는 연군 등의 고역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행위는 개인들의 개별적인 행위였지만, 그것이 확대됨에 따라 제주목과 대정, 정의현간의 부세 불균형은 더욱 심화되었고, 남아 있는 대정. 정의현 주민들의 부세 부담은 더욱 무거워져 제주도 전체의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조정에서도 수 차례에 걸쳐 논의하였으나 제주의 수령들에게 올바른 통치를 당부할 뿐, 별다른 근본적인 방책을 내놓지는 못하였다.


양반들의 위장전입이 과거급제를 위한 것으로 개인과 가문의 영달을 도모한 것이었다면, 백성들의 위장전입은 국가의 불균등한 부세제도 운용과 그 과정에서 자기에게 부과되는 가혹한 부담을 회피하기 위한 생계유지의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건, 위장전입이란 행위는 남의 권리와 이익을 가로채고, 공동체 전체의 부담과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의 해결은 양반 상류층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집행을, 백성들에 대해서는 부세불균형 해소라는 근본적인 접근을 통해 이루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19세기, 민란의 시대가 이어졌고, 이와 함께 조선도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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