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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의 「만세전」

문은희 사진
문은희
한국학학술정보관 문헌정보팀 책임사서원

해방 전 발행된 근대자료는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를 떠나 정확한 현황 파악조차 어렵다고 한다. 최근에 와서야 자료의 가치와 보존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와 같이 도서관에 소장된 근대자료들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후대를 위한 중요한 문화재적, 교육적 자산으로 보존, 관리, 공유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따라서 근대문화유산의 현대적 활용과 자료 접근도 제고를 위해 도서관에 소장된 염상섭의 「만세전」 초판본을 소개하고자 한다.


염상섭(1897~1963)은 작가 중에 드물게 서울에서 태어나 1963년 타계하기까지 약 16편의 장편소설과 160여 편에 이르는 중·단편소설들을 발표했다. 우리 도서관에서는 「만세전」, 「해바라기」, 「견우화」 등의 초판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 작품들은 염상섭이 1924년 7~8월에 걸쳐 한 달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출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만세전」은 식민지 시대 빼어난 문학작품이자 작가로서 염상섭의 위치를 굳혀준 작품으로 그의 자서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시대일보 연재, 1924

시대일보 연재, 1924

「만세전」이 쓰여 진 일제강점기 조선의 출판 및 인쇄문화는 일본의 검열과 탄압 속에서 많은 고난과 시련이 있었다. 염상섭의 「만세전」도 해방 전까지 일제의 감시에 따른 폐간과 연재 중단으로 총 3개의 판본이 존재한다. 최초의 판본은 1922년 7월부터 2개월간 「묘지」라는 제목으로 『신생활』에 연재되었다가 3회 만에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의해 전문삭제 처분을 받으면서 중단된다. 그 이후 염상섭은 「묘지」의 뒤를 잇지 않고 첫 회분부터 1924년 4월 「만세전」(1924.4.6.~6.4.)이라는 타이틀로 최남선이 주간하던 『시대일보』에 새롭게 총 59회를 연재하면서 완결을 보게 된다.

신생활지 연재, 1922

신생활지 연재, 1922

『시대일보』 연재가 끝날 즈음하여 「만세전」은 고려공사를 통해 단행본 초판이 출간되었다. 판권지에는 염상섭이라는 이름 대신 저작자 양규룡(梁奎龍)이 표기되어 있고 『신생활』 에 연재된 「묘지」에 비해 몇 군데 수정이 엿보인다. 요컨대 「묘지」의 인명은 영어 이니셜로 되어있는데 반해, 만세전에는 이름이 부여되어 있고, 문어체 문장이 좀 더 자연스럽게 고쳐져 있다. 본문은 총 195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국한문혼용체로 서술되고 있다.

고려공사 단행본 초판 표지, 1924

고려공사 단행본 초판 표지, 1924

서문

서문

판권지, 출처:화봉문고

판권지, 출처:화봉문고

「만세전」의 작품 구조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1918년의 겨울, 동경에서 서울, 서울에서 동경으로 가는 여로형 소설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 식민지 지식인의 내면을 가차 없이 속속들이 살펴본다는 점인데 일본 유학중인 평범한 조선 학생 이인화를 통해 식민지 지식인의 관점으로 비참한 조국의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은 일본인이 조선인을 대하는 현실에 대한 혐오감, 억압에 대한 불안감과 모멸감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1인칭 주인공 이인화의 시점에서 새로운 장소로 이동할 때 마다 사건이 이루어지는 전개로 주인공인 ‘나’를 통해 식민지 현실의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까닭 없이 처량한 생각이 가슴에 복받쳐 오르면서 몸이 한층 더 부르르 떨렸다. 모든 기억이 꿈 같고 눈에 띄는 것마다 가엾어 보였다. 눈물이 스며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승강대로 올라서며,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와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것이 생활이라는 것인가? 모두 뒈져버려라!’ 찻간 안으로 들어오며,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라고 나는 지긋지긋한 듯이 입술을 악물어보았다. (중간생략) ‘공동묘지다! 구더기가 우글우글하는 공동묘지다!’

주인공은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보면서 ‘이것은 무덤이다’ 라고 외친다. 이 외침은 3·1 운동 직전의 조선 사회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삶에 굴복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일제 강점하의 노예적 삶과 그러한 현실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는 주인공 이인화의 암담한 의식 세계가 바로‘무덤’인 것이다.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을 통해 염상섭은 겨울의 식민지 풍경을 차갑게 묘사하고 있다.

지난 11월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염상섭 문학展”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는 염상섭의 희귀 작품집을 처음으로 공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리 도서관에서도 최근 “개화기 서적상들과 근대출판”, “근대 베스트셀러의 탄생”을 주제로 전시를 개최하여 문화적 가치를 알린 바 가있다. 이처럼 근대문화유산은 한 시대 한 사회의 공감을 얻었던 근대인들의 삶의 궤적이며 이에 따른 근대자료의 보존과 활용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당면한 과제이다.

heyaff@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