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의 향기

그림으로 보는 옛 사람들의 여름나기

정은주 사진
정은주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선임연구원

장마가 끝나고 더위가 가장 심하다는 중복 그것도 대서(大暑)이다. 대서에는 “염소 뿔도 녹는다.”는 속담이 있듯 이 시기 찜통더위는 사람들의 인내심을 시험하게 한다. 이에 옛 그림 몇 장으로 옛 사람들의 피서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보며 잠시나마 더위를 식혀보는 것은 어떨까.

세상의 시름 잊고 맑은 시내에 발을 담그다

그림 1. 전선, <탁족도>

한 선비가 소매와 바지를 한껏 걷어 올리고 골짜기에서 흐르는 냇물에 흡족한 듯 발을 담그고 있다. 그 주위로 낚싯대와 거문고를 든 동자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내에서 더위를 잊고 간간히 거문고를 퉁기며 시를 읊거나 낚싯대를 던져 소소한 즐거움을 찾으려는 것이다. 이 그림은 원나라 은일화가 전선(錢選)이 그린 <탁족도(濯足圖)>이다.

 

이렇듯 속세를 등진 고고한 선비가 맑은 물에 발을 씻는 그림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초나라 충신이었던 굴원(屈原)이 모함으로 벼슬을 잃고 실의에 빠져 강가에 앉아 시를 읊는 중 만난 한 어부가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을 수 있으리(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라고 노래한 것을 그린 것이다. 이 「어부가」의 주제는 세상사에 얽매임 없이 자연에 순응하며 자신을 수양할 것을 의미하지만, 이를 소재로 한 그림은 창랑에서 발을 씻는 이미지로 재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창랑에 갓끈을 씻는 그림이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을 보면 옛 사람들의 세상도 혼탁하기만 했던 것일까?

너럭바위에 앉아 쏟아지는 폭포를 바라보다

노송이 기괴하게 기울어진 너럭바위 위에 그윽하게 앉은 한 선비가 맞은편 암벽 바위 사이에서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물보라 함께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를 바라보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 콸콸 쏟아지는 장대한 물소리에 귀가 뚫리고, 곧장 내리뻗어 사방으로 퍼지는 물보라에 눈이 절로 시원해지며, 마음까지 서늘하게 젓게 하는 장면이다. 이 그림은 조선의 문인화가 능호관 이인상(李麟祥)이 부채에 그린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이다.

이러한 ‘관폭도’의 기원은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시 「여산의 폭포를 바라보다(望廬山瀑布)」에서 비롯되었다. “향로봉에 해가 비치니 자줏빛 안개 일고, 멀리 보이는 폭포는 긴 내를 걸어놓은 듯하네. 나는 듯 흘러 삼천 척 아래로 떨어지니, 은하수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인가(日照香爐生紫煙, 遙看瀑布掛長川.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라는 구절은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그림의 소재로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림 2. 이인상, <송하관폭도>

소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다

한 선비가 너럭바위에 기대 앉아 소나무 그늘 아래서 책을 읽으며 유유자적하고 있다. 그의 시선은 멀리 장쾌하게 쏟아지는 폭포에 멈춰있고, 골바람에 흔들리는 청량한 소나무 소리를 들으며, 지친 몸을 편안하게 바위에 기댄 채 치켜든 책 속의 글귀를 음미하고 있는 듯하다. 이 그림은 명나라 화가 오위(吳偉)가 그린 <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이다.

명나라 장욱(張旭)은 그의 문집 「매암소고(梅巖小稿)」에서 송하독서를 “산수는 사계절을 향하고 천지는 만고의 마음자리니. 책 펼쳐 한가롭게 놀기 좋은 곳은 부들 땅 바로 소나무 그늘이라(泉石四時趣, 乾坤萬古心, 展書閒玩處, 蒲地是松陰)”라고 읊었다. 물론 독서는 사계절 내내 놓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한 여름 더위를 잊기 위한 독서처는 소나무 그늘만 한곳도 없었을 것이다.

그림 3. 오위, <송하독서도>

이제 절반을 지나온 올 여름, 거창하거나 요란하지 않지만 주변의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고 지혜롭게 더위를 이겨 내는 옛 사람들의 여름나기 몇 장면을 여러분에게도 ‘강추’하고 싶다.

pym1204@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