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조선의 국왕을 위한 변명

박용만 사진
박용만
왕실문헌연구실 책임연구원

조선은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처음부터 설계된 역사상 유일한 계획국가였다. 성리학적 교양으로 무장한 신하에 의해 국왕은 교육되었고, 국왕과 사대부의 조정에 의해 국가가 유지되었다. 국왕을 성군(聖君)으로 만들기 위한 제왕학은 요체는 백성이 국가의 근본임을 깨닫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국왕은 즉위 이후에도 끊임없이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교육받은 국왕은 당연히 당대 최고의 지식인일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가장 무능했던 임금은? 1번 선조, 2번 인조.” 얼마 전 우리나라 역사를 다루는 TV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한 질문이다. 이에 대해 패널들은 무능하다고 판단하는 근거를 웃으며 떠들어댄 적이 있다. 정말 선조와 인조는 국왕이 될 수 없을 만큼 무능했던 존재였는가? 시대가 변하며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관심이 높아질수록 검증되지 않은 낭설들이 마치 역사적 사실이었던 것처럼 부풀려져 횡행하는 것도 사실이다.

선조와 인조가 무능한 국왕으로 운위되는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국왕답지 못한 언행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양대 전란이 어찌 선조와 인조만의 책임이겠는가? 임진왜란은 일본의 팽창이 주된 이유이며, 병자호란은 중국 땅덩어리를 놓고 명과 청의 세력이 교체되는 과도적 정치상황이 근본 원인이다. 또 시선을 내부로 돌리더라도 전란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여 그 피해가 온전히 백성에게 돌아간 것이 두 국왕의 탓만은 아니다. 오히려 당파의 이익에 눈이 먼 관료와 사대부 지식인들의 책임이 더 클 것이다. 그럼에도 사대부들은 국왕의 뒤에 숨어 선조와 인조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말았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는데도 여전히 다투기만 하는 동인과 서인을 보며, 남한산성에 갇힌 상황에서 주화파와 척화파가 청에 보내는 문서를 찢고 다시 주워 붙이는 갈등을 보며, 당시 선조와 인조가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2008년부터 간행하고 있는 국왕자료집성은 조선후기 국왕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왕과 주변의 왕실인물들의 자료를 모아 분류하고 해설하며, 조선시대 국왕이란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지 새삼 절감하게 된다. 권력이니 의리니 당파니 하는 공허한 담론보다 문서 한 장에 담긴 국왕들의 고민과 그 흔적이 더 사실적이다.

조선의 국왕들의 첫째 화두는 ‘애민’이었다. 백성을 사랑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존재가 국왕이었다. 영조가 청계천을 준설한 것도,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여 형정(刑政)을 개혁한 것도 백성을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숙종과 경종이 ‘주수설(舟水說)’로 글을 지어 국가의 근간은 백성임을 잊지 않은 것도 애민의 결과이다. 조선의 국왕에게 ‘애민’은 단지 구호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배운 제왕학을 실천한 지식인의 자세였다.

한번 잘못 만들어진 망상(妄想)은 왜곡(歪曲)을 낳고, 그 왜곡된 이미지는 또다른 망상을 불러온다. 이제라도 조선시대 국왕의 관점에서 시대를 이해하려는 진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pym1204@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