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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6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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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Tip.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디지털포천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금과면 연결 항목 바로가기 [풍요로운 들녘을 울리는 농요, 금과 들소리] 1. 순창의 소리 문화 순창은 맑고[淳] 창성[昌]한 땅이다. 순창은 예로부터 옥천(玉川)·순화(淳化) 등으로 불릴 만큼 물이 맑고 순박하며, 절경이 많고 인심이 후덕하여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또한 순창은 전라북도 동남부 산간 분지에 속하지만, 예로부터 풍부한 농경 생산 덕택에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자연환경이 수려하여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알려졌다. ‘생거순남(生居淳南) 사거임실(死居任實)’이라는 말이 있다. 살아서는 순창·남원이 좋고, 죽어서는 임실이 좋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생거장성(生居長城) 사거순창(死居淳昌)’이라는 말도 있다. 살아서는 장성이 좋고, 죽어서는 순창이 좋다는 말이다. 이렇게 순창은 ‘살아 살기에 좋고, 죽어 살기에도 좋은 곳’이다. 오늘날에도 전국의 풍수가들이 명당처 중 한 곳으로 꼽는 고장이 바로 순창이다. 이러한 배경을 지닌 순창에 독특하고 풍요로운 소리 문화가 발달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며, 순창 지역 곳곳에는 논농사와 관련된 많은 민요가 전해 내려온다. 특히 순창의 들판에서 불리던 민요는 그 종류가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장단이며, 악조가 대단히 다채롭게 발달되어 있다. 순창은 소리의 고장이다. 판소리로 예를 들자면 순창은 동편제 판소리의 거두였던 김세종(金世宗)[1825~1898]을 비롯하여 장재백(張在伯)[1849~1906], 장판개(張判盖)[1885~1937] 등을 배출한 곳이며, 동시에 서편제 판소리의 비조였던 박유전(朴裕全)[1835~1906]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동편제의 고장이면서 동시에 서편제의 탯줄이 되었던 곳이다. 금과면은 아미산(蛾眉山)[515m]을 주산으로 한다. 금과면은 동서남북이 모두 산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북쪽으로는 덕진산(德進山)[380m]이 팔덕면과 경계를 이루고, 동북쪽으로는 금과면의 주산인 아미산이 있어 순창읍과 경계를 이루며, 서남쪽에는 서암산(瑞巖山)[450m]이 전라남도 담양과 경계를 이루고, 동남쪽으로는 설산(雪山)[522.6m]이 있어 곡성군 옥과면과 경계를 이룬다. 금과면의 하천은 모두 금과면 안에서 발원하여 흐르니, 금과 주민들은 외지의 물에는 한 방울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금과의 물만 먹고, 그 물로 농사짓는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남원의 지리산 아래에서 송흥록(宋興祿), 유성준(劉成俊), 김정문(金正文) 등의 명창이 나왔다면, 고창의 방장산 아래에서 신재효(申在孝)[1812~1884], 진채선(陳彩仙)[1847~?], 김소희(金素姬)[1917~1995] 등의 명창이 나왔고, 순창의 회문산 아래에서는 김세종, 박유전, 장재백, 장판개 등의 명창이 배출되었다. 회문산은 전라북도의 아버지 산으로서 완주의 모악산이 어머니 산에 해당한다. 또한 회문산은 북쪽의 모악산과 남쪽의 광주 무등산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 순창 소리는 동서편의 장점만을 취한 가장 세련된 소리로 일컬어지는 보성 소리의 원 탯줄이 되었다. 이러한 순창에서 불리는 농가 소리 역시 판소리 음악의 양대 악조로 일컬어지는 우조와 계면조의 특성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판소리 음악의 전통을 기층 음악인 농요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2. 금과 들소리와 판소리의 비교 또한 순창의 민요에 내재된 장단을 분석해 본 결과, 비록 판소리에서처럼 규칙적인 균등 박자로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판소리의 주요한 네 가지의 장단 틀인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등이 고루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순창 지역의 민요를 살펴보면, 순창군은 지리적으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며 동시에 전라도 서부 평야와 동부 산간의 중간에 위치함으로써, 도로와 하천을 따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충돌하는 가운데 오히려 보다 다양하고 독특한 소리 문화의 특성을 낳은 고장임을 알 수 있다. 순창군 금과면 지역은 전라북도 서부 평야 지역에 비해 밭농사를 많이 짓기는 하지만 여전히 논농사가 주가 되는 답주전종(畓主田從)의 노동권으로 분류된다. 금과면에서 불리는 농가 소리[농요]는 「물푸기 소리」, 「모찌는 소리」, 「모심기 소리」, 「김매기 소리」, 「장원질 소리」 등이 있다. 전라북도 서부 평야 지역의 농요가 산업화와 함께 일찍 소멸되거나 불완전하게 전승되고 있고, 동부 산간 지역의 농요는 단순 소박하며 미분화 상태에 머물고 있다. 이에 반하여 임실·순창·남원 등의 동부 산간 분지 지역에서 불리는 농요는 오늘날에도 전승 상태가 양호하며 곡조의 분화와 함께 음악적 내용이나 가창 방식 등에서도 다양한 층위와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 금과면 전경 금과 들소리 전수관 가상현실 바로보기 「금과 들소리」의 음악적 특징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판소리에서 사용되는 두 개의 주요한 악조인 우조·계면조 등의 음계와 선법이 금과 들소리에 고루 섞여 있다는 점이다. 전라북도 동부 산악 지역의 민요는 대개 메나리조로 짜여 있고, 서부 평야 지역의 민요는 대개 남도 육자배기조로 짜여 있다. 이에 반하여 동남부 산간 분지에 속하는 순창군의 민요는 우조와 계면조가 고루 발달해 있으며, 「금과 들소리」도 이러한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며 두 악조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둘째, 전라북도 서부 평야 지역 들노래의 가창 방식이 주로 선후창 방식으로 불리며, 동부 산악 지역의 들노래는 주로 교환창 방식으로 불린다. 이에 반하여 동남부 산간 분지에 속하는 순창 지역의 들노래는 선후창 방식과 교환창 방식, 그리고 제창 방식이 고르게 섞여 있다는 점이다. 셋째, 「금과 들소리」는 특히 김매기 과정에서 일의 분화에 따른 곡조의 분화가 매우 다채롭다. 인근의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 학촌 마을에서 전해지고 있는 들노래 9곡 중에서 8곡이 논매는 소리에 해당할 정도로 김매기 과정에서의 곡조 분화는 순창 들노래의 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넷째, 「금과 들소리」의 「김매기 소리」는 우조 선법을 중시하면서도 창법상으로는 대체적으로 기식음(氣息音)을 풍부하게 사용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씩씩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식음[하·허·흐·해·후·히]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들소리를 더욱 씩씩하고 힘찬 느낌을 주게 한다. 금과 들소리 동영상 바로가기 디지털순창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Tip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4. 금과 들소리의 음악적 특징 산 하나만 넘고 물줄기 하나만 건너도 문화는 달라진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가장 각광받는 판소리 법제는 보성 소리이다. 보성은 지리적으로 남원-구례-순천으로 연결되는 지형과 순창-담양-광주-나주-영암으로 이어지는 지형의 가운데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산간 지역과 평야 지역이 만나는 중간인 보성에서 동편 소리와 서편 소리가 만나 가장 섬세하고 다양하며 치밀하게 짜인 소리라는 평가를 받는 보성 소리가 탄생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금과면에서 가장 가까이 이웃한 전라남도 담양의 농요는 「금과 들소리」와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담양의 논매는 소리[담양군 월산면 월계리 복정 마을]에는 「사소리」, 「방개 소리」, 「매화 타령」[「장원례 소리」], 「사뒤요 소리」, 「어하질로」 등이 있다. 이중 제일 마지막에 부르는 「어하질로」의 메기는 소리[‘미 음계’]를 제외한 나머지 소리들은 모두 솔·라·도·레·미의 ‘솔 음계’로 되어 있다. 이것은 흔히 경조 혹은 경토리라 불리는 선율이다. 따라서 담양의 농요에는 금과 농요와 같이 판소리의 우조와 계면조가 균형이 잡혀 있지 않고, 하나의 선법[경조, 우조]이 지배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하겠다. 판소리 음악의 배경을 기층 음악인 농가 소리에서 실증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즉 동편제 판소리에서 주장하는 우조와 서편제 판소리에서 주장하는 계면조가 「금과 들소리」에 골고루 섞여 있으며, 또한 판소리에서 사용되는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등의 주요 장단 틀이 그대로 농요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순창 지역 농요에 판소리 우조와 계면조의 양대 선법이 골고루 섞여 있음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라북도 동부 산악 지역의 농요는 주로 메나리조로 불리고, 서부 평야 지역의 농요는 주로 남도 육자배기조로 불리기 때문이다. 옹기 민속 박물관(甕器民俗博物館)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삶이 담겨 있는 옹기의 뿌리를 찾고, 그 발자취를 더듬어 현대 문명에 의해 퇴색되어 가고 있는 옹기 문화를 재조명하고, 더불어 우리 민족만이 갖고 있는 옹기와 민속의 맥을 보다 깊이 있게 연구하여 현장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고(故) 정병락이 사재를 털어 1991년 4월에 고려 민속 박물관을 설립하였으며, 1993년 3월 25일에 옹기 민속 박물관[문화 체육 관광부 등록 제48호]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금과 들소리의 전승 현황 금과면 매우리는 순창 군내에서도 들소리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금과 들소리」는 특히 2002년 제43회 한국 민속 예술 축제에서 종합 최우수상[대통령상]을 받아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 이후로 금과 들소리 보존회 사무실을 새로 만들어 더욱 열심히 들소리를 보존·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순창의 「금과 들소리」는 2005년 3월 11일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다. 1940년 순창에서 태어난 이정호는 「금과 들소리」의 선소리꾼이다. 박홍규, 양학구, 설동근 등에게 들소리를 사사받았다. 전북 예술 경연 대회, 전국 민속 예술제, 전국 민요 경창 대회, 전국 시조 가사 경창 대회 등 다수 대회에서 입상하였다. 500여 년 전부터 모정을 중심으로 동전·대장 들녘에서 불리던 「금과 들소리」에는 힘든 농사일을 상호 부조의 품앗이를 통하여 극복하면서 풍년을 기원하는 소박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옹기(甕器)는 약토(藥土)라는 황갈색의 유약을 입혀 구운 토기를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며, 옹(甕·瓮)은 ‘독’이라는 우리말의 한자어이다. 옹기는 꿀단지에서 똥 단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살림살이와 삶을 요모조모 담아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그릇이다. 이렇듯 옹기는 갖가지 크고 작은 모양을 한 채, 장독대를 지키며 각종 부식 저장고 역할을 하는가 하면, 우물가의 물동이에서 부엌의 조리 기구를 거쳐 밥상 위의 식기와 묘지 속에서 주검을 갈무리하는 옹관묘의 관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옹기 민속 박물관 소장 굴뚝 연결항목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TIP)『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이와 같이 서민의 그릇으로 자부해 온 다양한 옹기가 이제는 현대 문명에 밀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으며, 박물관 진열장에서나 전시되어 옛 조상들의 삶의 궤적을 보여 주고 있다. 손때 묻은 옹기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는 옹기 민속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것으로 전락한 상태였으나, 최근 자연 친화적인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새롭게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옹기 민속 박물관은 옹기 200여 점을 비롯하여 토기 100여 점, 민속 생활용품 100여 점, 농기구 100여 점, 석조물 100여 점 등 총 3,000여 점의 민속품을 소장하고 있다. 옹기 민속 박물관은 옹기 전시실[지하 1층], 단청 전시실[지상 1층], 민속 생활용품실[지상 2층] 및 야외 전시실 등 총 4개 전시실과 민속 체험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는 우리 조상들이 사용해 왔던 생활 용기인 옹기 200여 점을 직접 진열하고 있으며, 각 사찰과 5대궁 4대문 안에 있는 단청 문양 1,000여 종을 지상 1층 천장에 그려 넣어 조선 시대의 단청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진] 옹기 민속 박물관 전시실 모습 9. 청학동(靑鶴洞) 영평 8경 중 제8경으로,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금주리에 있는 계곡이다. 일동면으로부터 흘러내려온 물을 암석 병풍과 같은 형태의 절벽이 둘러싸고 있다. 큰 바위와 절벽이 있이 하천과 함께 어우러진 경치를 보여준다. 청학동의 명칭과 관련해서는 설화가 전한다. 어떤 가난한 효자가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이장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한 삽을 뜨는 순간 그 속에서 청학 한마리가 나와 슬프게 울며 창공에 원을 그리면서 날아가서 효자가 그곳에 산소 쓰기를 단념했다고 한다.
암벽 낭떠러지에는 ‘청학동(靑鶴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진] 청학동 옹기 민속 박물관 소장 물박 연결항목 옹기 민속 박물관 소장 어미 독 연결항목 옹기 민속 박물관 소장 장군 연결항목 옹기 민속 박물관 소장 물박 연결항목
이 밖에도 장인의 솜씨가 담긴 목공예, 짚풀 공예, 종이 공예, 금속 공예품, 관혼상제·무속·신앙 용품 등의 민속 생활용품과 각종 농기구를 전시하고 있어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야외에는 석조물과 장독대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옹기 민속 박물관은 어린이와 가족을 대상으로 도예 교실, 민화 교실, 다도 교실 등 체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옹기와 전통 문양 관련 특별전을 개최하여 다양한 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게 하고 있으며, 옹기 관련 도서를 지속적으로 발간하고, 현대 옹기장이들의 옹기 작품도 전시·판매하고 있다. 옹기를 비롯한 소장 자료는 등록 자료 300여 점과 미등록 자료 3,0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한민족의 정서를 담고 있는 옹기는 먹거리를 위해 곡식, 장류, 김치, 젓갈류 등을 보관하던 대표적인 그릇으로 지방별로 그 형태를 달리한다. 서울·경기 지역은 햇빛 차단이 남쪽보다 덜해 옹기의 주둥이와 밑바닥의 너비가 비슷하고 중간이 배부르며 약간 뾰족한 형태이다. 충청도는 대류 현상에 맞춰 이 보다 중간이 더 불룩한 타원형이며, 강원도는 이동의 편리성을 띠고, 해산물이 많아 작으면서 잘 깨지지 않게 하기위하여 배 부분이 거의 일직선이거나 주둥이가 아주 좁은 형태이다. 전라도는 농경지가 발달해 크고 둥글며 배 부분보다 어깨 부분이 더 불룩한 형태이다. 오지그릇의 제조가 활발했던 경상도는 내륙 지방과 달리 해안선을 따라 독의 유통이 많아 옹기의 어깨 부위가 발달되어 있고, 입 지름과 밑 지름이 좁다. 옹기 민속 박물관의 옹기들은 식생활 옹기를 비롯하여 거름통, 요강, 화로, 굴뚝, 독우물 등 주거 생활용과 악기용 옹기 그리고 업단지, 신주 단지 등 민간 신앙용 옹기가 전시되어 있어, 서민 생활 깊숙이 자리했던 옹기 문화의 전반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옹기 민속 박물관은 한국 최초의 옹기 민속 박물관이자, 서울시 도봉구에 위치한 도봉구 유일의 사립 박물관으로, 쌍문동 497-15에 위치하고 있다. 옹기 민속 박물관은 도봉구 구민의 문화 향유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구민 문화 회관, 도봉 문화원 등에서 옹기 특별 전시와 체험 학습 등을 개최하며, 더 나아가 최근 주말 문화 체험 학습의 열기를 반영하여 주말 옹기 체험 학습을 실시하고 있다. 또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삶이 담겨 있는 옹기의 뿌리를 찾고 그 맥을 이어가고자 국내는 물론 국외 옹기 특별전에도 출품하여 옹기 문화를 선양하고 있다. 옹기 민속 박물관은 우리 조상들이 사용해 왔던 생활 용기인 옹기와 각 사찰과 궁궐 등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의 단청, 농기구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급격하게 변모되어 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의 장으로 의의가 있다. [사진]옹기 민속 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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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순창문화대전」속으로의 여행 (1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전자 편찬 사업『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 중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 정보를 총망라한「디지털순천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사진] 디지털순찬문화대전 홈페이지 그럼 도봉구에 대해 알아보는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권선문첩으로 조선 시대 순창 여인들의 서화 세계를 보다] 조선 시대 여인들의 생활은 일반적으로 정숙하고 도덕적이며 남편에 대한 내조를 강조해 왔던 삶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회적 풍조는 특히 양반 계층의 여성에게 더욱 요구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당시의 여성들의 삶의 덕목으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여성들의 사회 참여는 당연히 제한적이었으며 또한 활동 공간도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시대 여성들이 모두 가사에만 한정하여 가정 안에서만의 존재로 머물렀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 좋은 예로서 『설씨 부인 권선문(薛氏婦人勸善文)』[보물 제728호]을 남긴 순창의 설씨 부인[1429~1508]을 들 수 있다. 1. 작품이 남아 있는 최초의 여성 화가 조선 시대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은밀하게 이루어졌으나 그들의 활동은 사회 여러 곳에서 큰 영향을 주고 있기도 하다. 특히 조선 여인들의 서화 활동에서도 그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선비 화가였던 강희안(姜希顔)[1417~1464]은 “선비가 그림을 후세에 남기는 것은 이름을 욕되게 한다.”라고 했던 말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서화에 대한 양반 계층의 이해를 보면 특히 여성들이 서화를 즐긴다는 것을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조선 시대 여성 화가들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은 저간의 이유를 알 만하다. 그래서 설씨 부인이 남긴 권선문첩(勸善文帖)은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의미를 가진 자료일 수밖에 없다. 이 권선문첩은 설씨 부인이 기록으로 남은 역사상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여성 서화가로 지목되며 한편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 보다도 70여 년이나 앞서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이러한 권선문첩을 통해 당대 순창 여인들의 서화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2. 설씨 부인은 누구인가 설씨 부인 신경준 선생 유지 전경 동영상 바로보기
설씨 부인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 여인들 거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설씨 부인은 설백민(薛佰民)의 딸로 순창에서 태어났으며, 문장과 서화에 능하였다. 그 외의 행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남편이었던 귀래정 신말주(申末舟)[1429~1503]의 행적을 통해 그녀의 삶의 일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귀래정 신말주는 1429년(세종 11)에 태어나 1454년(단종 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섰다. 1455년에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즉위하자 병을 핑계 삼아 부인의 고향인 순창 남산대에서 은거하였다. 1459년(세조 5)에 다시 대사헌 및 형조 참의가 되었으나 1467년(세조 13)에 낙향하였다. 1476년(성종 7)에 전주 부윤으로 1년간 봉직하다 낙향하였으나 10년 후 창원 도호부사 그리고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와 대사간을 거쳐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끝으로 순창에 머물다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말주 선생의 십로계첩 바로보기 설씨 부인 신경준 선생 유지 전경 가상현실 바로보기 5. 권선문첩의 의미 권선문첩은 오랫동안 학계에 알려져 있지 않은 보물이었다. 특히 권선문첩에 담겨있는 설씨 부인의 부도암도는 그 기법이나 회화사적 의미로서의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잠자고 있었다. 권선문첩은 지난 2000년 순창 문화유산을 조사하면서 본격적으로 학계에 등장하게 되었고, 이 그림이 조선 시대에 남아 있는 최초의 여성 화가의 작품으로서 주목받게 되었으나 이후 연구가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부도암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앞으로 지속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권선문첩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로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순창이라는 작은 지방에서 활동했던 한 여성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며, 둘째로 우리 역사에서 이만한 학식과 서화를 익힌 여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조선 초기 유학이 크게 확산될 당시 여성의 활동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셋째 주로 고향 순창에서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설씨 부인이 중국 화풍이 일반화되어 있던 당대에 새로운 화풍이었던 한국적 화풍을 어떻게 익혔는지 하는 것이다. 권선문첩은 설씨 부인이라는 한 여성의 활동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뿐 아니라 조선 시대 여성들, 특히 양반 계층의 명문가 여성들이 폭넓게 학문을 익히고 서화를 다루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자료가 다양하게 남아 있지 않은 아쉬움이 크다. 6. 권선문첩과 순창 여인들의 서화 활동 설씨 부인이 남긴 권선문첩은 앞서 언급된 대로 여러 면에서 조선 시대 여성들의 서화 활동과 함께 여성들의 사회 참여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특히 설씨 부인의 활동으로 작은 고을이었을 순창 여성들의 삶의 모습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 크다. 설씨 부인은 권선문첩을 제작하고, 부도암의 시주를 독려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돌려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이 권선문첩을 통해 시주를 독려할 대상은 아마도 평소 설씨 부인과 교분이 깊었던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당시 많은 여성들이 사회적 교류를 통해 함께 서화를 즐기고 감상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덕망이 높았던 설씨 부인을 통해 많은 여성들이 글과 그림을 익혔을 가능성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러한 여성들의 사회 활동은 아마도 일찍부터 내려온 풍속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 시대를 통하여 꾸준히 이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자세한 정황을 엿볼 수 있는 자료나 서화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아 연구의 한계가 있는 점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화면 구성이 매우 탄탄하고 근대적인 시각을 보여 주고 있어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화면의 전체적인 시선은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바라보는 모습인데 반해 맞배지붕을 한 부도암 건물은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바라보는 형태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암자의 주 건물은 2칸이며 오른편에 지어진 부속 건물은 한 칸인데 약간 높은 축대를 쌓아 지은 건물이다. 그리고 앞 왼편으로 일주문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이 있다. 부도암이 매우 작은 암자였음을 보여준다. 설씨 부인이 부도암의 구조와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평소 이러한 불사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부도암도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광덕산의 묘상에 있다. 화면 상단 중앙에 주봉을 세우고 좌우 대칭으로 묘사한 산의 묘법이 매우 한국적 특색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 초기 산수화의 대가였던 안견(安堅)의 화풍에서 나타났던 단선점준(短線點?)과 산 능선에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 묘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측필(側筆)을 사용하여 단순하게 처리한 후경의 소나무 숲, 그리고 전경의 소나무 잎을 그린 해조묘법(蟹爪描法)에서도 그녀가 얼마나 당대 화풍을 깊이 있게 소화했는지를 보여 준다. 3. 권선문첩의 제작동기 신말주가 이처럼 단종, 세조, 성종 등을 거치며 낙향과 벼슬을 번갈아 했던 것은 그가 얼마나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는지를 알게 한다. 그리고 설씨 부인 역시 대대로 순창 명문 가문의 여식이었으며 한편으로 덕망이 높은 여성으로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신망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설씨 부인이 부도암(浮圖庵)[강천사의 전신]의 승려 약비(若非)의 요청을 받고 곧바로 권선문을 지어 주변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고 부도암 개축에 협조하도록 요청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남편 신말주 또한 순창 인근에 살던 여러 선비들과 정기적으로 교유하며 시문을 나누었음을 『신말주 선생의 십로계첩(申末舟先生의十老契帖)』[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42호]에서 알 수 있다. 『신말주 선생의 십로계첩』은 그의 나이 70세에 썼으며 열 명의 노인들이 모여 모임을 함께 하며 감상하였다 한다. 이러한 저간의 활동으로 보아 부부가 풍류를 즐기고 학문에 밝아 당대 많은 인물들과 교유하며 존경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루는 설씨 부인에게 승려 약비라는 사람이 찾아와 말하였다. 순창군 내 인근 광덕산 중에 작은 사찰이 하나 있는데 이 절을 부도암이라 한다. 그리고 이 부도암에 승려로서 중조라는 스님이 부도암을 개축하고자 하니 부인의 시주를 원하노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설씨 부인은 “참으로 좋은 일이나 본인이 직접 나서서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기 어려우니 내가 이러한 내용을 직접 써서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겠노라.”라고 약속하였다. 승극철 부부묘 연결 항목 서울 초안산 분묘군 가상현실 바로가기 그리고 설씨 부인은 곧바로 부도암 개축에 대한 여러 자세한 내용을 서술하고 시주를 원한다는 글과 함께 부도암의 모습을 그린 권선문을 만들었다. 이러한 저간의 내용들이 권선문첩에 자세히 기록되었으며 또한 산수화 형식을 빌린 부도암의 정경이 함께 담겨 있어 설씨 부인의 활동과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그리고 예술적 활동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게 한다. 4.광덕산 부도암도 초안산은 고려 시대 개경을 보좌하는 부도인 남경(南京)의 후보지로 거론될 만큼 명당의 자리이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내시들의 묘는 도성에서 10리[약 3.93㎞] 밖에 두게 하라”는 것에도 잘 부합한다. 다시 말해 초안산은 도성에서 가까운 명당으로, 왕이 있는 서쪽의 도성을 바라보며 묻힐 수 있던 장소이었던 것이다. 승극철의 묘에서 주목되는 것은 ‘양위 지묘(兩位之墓)’라는 문구이다. 설씨 부인이 쓰고 그렸다는 것이 확실한 권선문첩에는 글과 함께 부도암도(浮圖庵圖)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광덕산에 있는 부도암의 모습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 주기 위해 부도암 개축에 관한 글을 쓰고 그려 넣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광덕산을 부감법으로 조망하고 그림 중앙에 부도암이 들어 있다. 그림 하단을 전경으로 삼아 큰 소나무와 떡갈나무를 배치하고 산세의 흐름을 오른편으로 몰아 상단 왼편으로 시선이 옮겨 가게 구성되어 있다. 광덕산이 화면 전체적으로 꽉 찬 모습이며 부도암으로 시선이 집중되도록 중앙에 널찍한 공간을 설정하고 건물 세 채를 가진 부도암을 그려 넣었다. [사진] 설씨부인 권선문첩 은퇴 후에는 한양 사대문 밖 한적한 곳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들의 생활 수준은 『한성부 북부장 호적』[1663]에 의하면 양자뿐 아니라, 솔거 노비·외거 노비까지 거느리는 경우도 있었다. 궁녀들의 묘역은 주로 궁궐과 멀지 않은 명당자리로 알려진 곳에 분포해 있다. 그러나 궁녀 묘 유적 현황을 보면 내시 묘와 달리 현재까지 파악된 묘비는 9기에 불과하다. 이유는 아마도 궁녀들은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면 자연 비구니로 사찰에서 일생을 보내다 죽은 후 주로 화장이 행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는 부부가 함께 묻힌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내시도 결혼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시들은 권력의 정도에 따라 실제 부인을 비롯해 첩까지 두고 살았던 것으로 전하는데, 이럴 경우 합장하여 단독 또는 쌍분 묘로 만들어졌다. 승극철 부부 묘의 좌향은 일반적인 남향(南向)이나 동향(東向)과 달리 서향(西向)이다. 이는 좌향이 왕이 계신 궁궐 쪽을 향함으로써 죽어서도 내시로서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의미로, 시자(侍子)로서 충정(忠情)의 의미를 따른 것이다. 초안산에는 내시 묘 말고도 궁녀의 무덤도 찾아볼 수 있다. 상궁 개성 박씨(開城朴氏) 묘가 그것이다. 상궁 개성 박씨 묘는 초안산 본산 내 초안산 아파트 뒤쪽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상궁 묘역에는 봉분과 상석·향로석이 잘 보존되어 있는 반면, 주위에는 부러진 비신과 머릿돌이 방치되어 있다. 조선 시대 궁녀들은 일반인과 달리 집단을 이루며 살았는데, 궁궐과 가까운 곳에 기거해야만 하는 까닭에 주로 오늘날 서울시 종로구 효자동·창덕궁·봉익동·운니동·계동 지역 주변에 살았고 [우리 문화의 지킴이 간송 전형필] [사진] 서울 초안산 분묘군 전경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해 문화재를 수준 높은 안목으로 체계적으로 수집해 문화유산을 수호하고 현재까지 계승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던 인물이다. 도봉구 방학동에 전형필이 생활하였던 근대기 전통 가옥과 함께 묘소가 인근에 소재해 있다. 간송의 활동은 우리의 문화재가 도굴, 밀반출되었던 상황 속에서 해외 유출을 막고, 후대에 전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의 교육 정책에도 항거하여 보성 학교의 인수를 위해 1940년에 재단 법인 동성 학원(東成學園)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1947년에 고적 보존 위원회 위원, 1954년에 문화재 보존 위원회 위원으로 피촉되었고, 1960년에 고고 미술 동인회 발기인 등으로도 활약하였다. 「디지털순창문화대전」에 담긴 정보와 자료들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사이트 및 지역별 사이트(순창문화대전),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12년 4월부터 2015년 4월까지 약 3년에 걸친 작업 기간을 통해 원고 집필, 윤문․교열,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영문화 번역 연구, XML 데이터 제작, 서비스 시스템 구축 사업이 진행되었고, 총 1,700개의 항목, 원고지 12,000매, 사진과 동영상 등 총 3,144종의 멀티미디어 자료를 담고 있습니다.
2012년 4월 순창군과의 협약을 통해 추진된 이 사업은 2012년 7월부터 같은 해 11월까지 기초조사 연구를 통해 순창군의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ㆍ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원고 집필 사업(2013년 6월~2014년 3월, 전주대학교),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사업(2013년 10월~2014년 10월, ㈜이모션), 원고 윤문․교열 사업(2014년 5월~7월, ㈜휴머니타스), 영문화 번역 연구(2014년 5월~2014년 7월, 윤즈정보개발), XML 데이터 제작 사업(2014년 6월~9월, ㈜나라지식정보), 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2014년 6월~10월, ㈜올인텍아이엔씨)이 수행되었습니다. 「디지털순창문화대전」(http://sunchang.grandculture.net/)은 전라북도 순창군 지역의 디지털 백과사전으로, 순창군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해 정치·경제·사회의 발전상 등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정보를 집대성해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간송 전형필이 국보급 문화재를 수장해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이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태어난 남다른 애국심과 심미안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나 당대 예술가, 지식인들과의 활발한 교유 활동 역시 큰 역할을 하였다. 독립운동가였던 위창 오세창(吳世昌)을 비롯하여 여러 인사들과의 친분은 미술 작품에 대한 해박한 안목과 최고의 식견을 기르게 했고,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고 전승하는 뜻을 세워 실천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실제 간송은 서예, 전각, 그림, 도자기, 수필, 각종 기고문 등 많은 글과 작품을 남겼으며 음악, 연극에도 조예가 깊어 문화 비평가의 자질까지 갖췄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 문화의 지킴이 간송 전형필 동영상 바로보기 간송이 활동하였던 1930년대는 일제 강점기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한일합병 이후 수준 높은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는데, 극심한 도굴로 문화재뿐 아니라 유적이 파손되거나 소멸되면서 문화적으로 참담한 상황에 직면했던 때였다. 일본은 아예 경성 미술 구락부라는 미술품 경매장까지 차려놓고 조직적으로 전국의 문화재를 흡수했는데 이를 통해 일본 수집가들이 재력과 권력을 앞세워 국내에 있는 수준 높은 문화재를 쓸어 모으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간송은 일본에 유출되는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증조 때부터 서울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해 10만석 부호가의 상속권자였던 간송은 자신의 재력을 기반으로 경성 미술 구락부 경매에 좋은 물건이 나오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현재 국보 제68호인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도 이 경매에서 6천원에 구입한 것으로 당시 쌀 한가마니가 15원~16원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외에도 한남서림(漢南書林)[현 통문관]이라는 고서점도 운영하였는데, 이곳으로 골동품 매입 신청이 들어오면 정확한 감정을 통해 문화재를 사들이는 창고로 활용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훈민정음 원본도 이곳을 통해 입수된 것이다. 조선 총독부에 알리지 않고 몰래 숨겨두었다가 해방이 되면서 그 존재를 알렸다고 한다. 이와 같은 헌신적인 노력으로 간송의 소장품에는 회화, 도자, 금속 공예, 불교 조각, 전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보급 문화재들이 포함되어 있다. 최근 2011년 3월에는 12점이 국보로, 12점이 보물로, 4점이 서울시 지정 문화재가 되었고,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송의 소장품은 우리 문화의 정수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간송의 뜻과 업적, 열정을 대변해 주는 것이며,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대변해 주는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간송 미술관의 소장품은 연중 봄·가을 두 차례 특별전을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간송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일찍부터 가치 있는 문화재를 수장하고자 자신의 힘과 막대한 재산을 쏟았으며, 일제 강점기 암울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의 문화재가 밀반출되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 우리의 문화유산을 수호해 현재까지 계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2년 교육 공로자로 표창을 받은 이후 1962년 사망한 해 광복절에 대한민국 문화 포장이, 1964년에는 대한민국 문화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에는 문화 체육부에서 11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하였다. 1962년 1월에 향년 57세의 나이로 작고한 간송은 방학동에 소재한 아버지 묘역에 함께 묻혔다. 묘소 주변에는 살아생전 간송이 거처했던 근대기 전통 한옥[등록 문화재 제521호]이 있어 묘소와 함께 간송의 자취를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