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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에 온 공신교서, 1613년 성시헌 익사공신교서 노인환(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연구원) 1392년 7월 16일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건국된 조선(이 국호는 1393년에 명의 승인에 의하여 채택)은 말할 것도 없이 이전 왕조인 고려의 제도를 계승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본격적인 제도 개혁은 이후 태종, 세종, 성종 대를 거치면서 완성되어 간다. 따라서 조선초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는 고문서 1점을 들어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현존하는 조선 최고(最古)의 임명문서는 1393년(태조2) 10월 일에 도응(都膺)을 전의소감(典醫少監)에 임명하는 문서이다.(도판 참조) 조선시대에는 개국, 반정을 통한 정권교체, 역모 및 반란의 진압, 전란 등과 같이 특정한 사건에 공을 세운 사람을 공신으로 녹훈(錄勳)하였다. 공신에게는 공에 따라 1~4등으로 등급을 나누고 공신교서·공신녹권·공신화상과 전답·노비 등을 내려주었다. 이러한 공신의 녹훈은 1392년(태조 1) 개국공신부터 1728년(영조 4) 양무공신까지 모두 28번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일부는 정치적인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삭훈(削勳)되었는데, 명종 연간의 위사공신과 광해군 연간의 위성공신․정운공신․익사공신․형난공신 그리고 경종 연간의 부사공신이 삭훈되었다. 조선시대 공신은 28번 녹훈되어 총 957명이 있었지만, 이들에게 내려진 공신교서는 현재 76점이 현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는 지난 2012년에 ‘조선의 공신’이란 주제로 특별전을 개최하여 공신교서뿐만 아니라 공신녹권·공신화상·공신회맹축 등을 전시하였다. 공신과 공신교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최근 장서각에서는 1613년(광해군 5) 성시헌(成時憲) 익사공신교서(翼社功臣敎書)를 수집하였다.
익사공신은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의 역모를 평정하는 공을 세운 공신으로 총 48명이 녹훈되었지만,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한 1623년(인조 1)에 곧바로 삭훈되었다. 조선시대에 삭훈된 공신의 경우에 공신교서와 공신녹권·공신화상 등을 수거하여 소각하였다. 그러나 성시헌 익사공신교서는 현재까지 전해져서 장서각에서 수집하였다. 성시헌 익사공신교서의 사료적 가치는 익사공신교서 중에 유일한 교서이며, 삭훈된 공신교서 9점 중에 하나이다. 이번 성시헌 익사공신교서의 수집을 통해 광해군 연간의 공신에 대한 연구 및 공신의 녹훈과 삭훈에 대한 연구 등이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사진1> 팔공산에 모여 창의한 서른 두 의병장의 자(字)를 넣어 지은 시문 문헌 자료는 그것을 생성시킨 사람과 시공간이 한데 어우러져 있을 때 비로소 그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얘기를 들려준다고 하던 선배 연구자들의 경험담을 새삼 되새겨본다. <사진2> 『기양세고』 : 류의손, 류복기, 류우잠의 문집 합본 [사진]<자탄(自歎)> <자탄 갑인 년 봄에 쓴 시>
하늘이 내 재주를 내심에 반드시 쓸 데 있건마는
예로부터 현철한 이는 다 마음을 수고로이 하였다.
여자로 태어난 것도 한인데, 또 이룬 것이 없으니
희끗희끗한 머리털 누가 막으리오?! 손으로 가슴을 만지며 앉아 길게 탄식하니
쇠잔한 등잔불 깜빡거려 밤은 이미 깊었다.
홀연 들으니, 자규가 텅 빈 산 속에서 울며
목청을 굴리고 혀를 놀려 슬픈 소리 뱉어낸다. 밤마다 쉬지 않고 울어
시름겨운 이에게 눈물로 옷깃 적시게 하네.
바다 위로 떠오른 밝은 달이
새벽에 구름 사이에 잠길 줄을 그 누가  알았으리요?! 하루아침에 병들어 누우매 서로 알 리 없으니
도도한 세상 정이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
마음은 뜬구름 같아 정한 곳 없으니
이로부터 고향 찾기가 더디고 더디구나! 1854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위 시에서 시적자아는 타고난 재능과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한탄하고 있다.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은 예전부터 항상 마음이 괴로웠다는 표현으로 자기 자신에게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기 합리화 혹은 자기최면을 걸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형성된 주체적 내면의식을 자신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가슴을 치며 탄식하기도 하고, 밤에 울어대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면서 슬픈 노래도 불러보고, 밤마다 울어도 보지만 이미 늙어버린 몸을 어쩔 수 없었다. 주체적 내면을 가진 개성은 결국 기존 질서로의 편입이 아닌 자기 확장의 길로 들어섰을 때 생긴다. 의식에서든지 혹은 행위에서든지 자신의 지향점을 사회적 질서나 기존의 관념으로 향하지 않고 내면으로 향했을 때, 자신의 내면성에 개인의 주체성으로 확립되고 진정한 내면세계의 개인화가 이루어진다. 기각은 주체적 내면을 가진 개성이 형성되었으나, 이를 외부로 확장시키는 강하면서도 도발적인 실천을 하지 못한 채 시를 통해 자신의 주체적 내면을 표출하고 있다. 시적자아는 고정된 사회질서와 관념에서 완전한 주체적 내면의 개인화를 이루어지는 못했지만, 19세기 중반을 살다간 한 여성을 통하여 여성들에게는 억압된 유교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가는 여성의 주체적 내면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효장세자의 그림은 지금 이 시대의 아이들 그림과 비교해도 예사롭지 않다. 지우거나 고칠 수 없는 필묵으로 거침없이 그려낸 감각적인 필치가 돋보인다. 부왕인 영조도 어린 시절 누구보다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영조대왕행장』의 한 구절을 보자. “무릇 글씨와 그림은 다 배우지 않고도 잘 하시어 필묵을 가지고 노실 때마다 빼어난 풍채가 사람들의 눈을 감동시켰다.” 효장세자도 영조의 이러한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하다. 효장의 이복동생인 사도세자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지녔다. 두 점의 낙서에는 닮고 싶고, 뛰어 놀고 싶은 어린 세자의 무의식 세계가 담겼다. 또한 책을 가까이 하려는 세자의 또 다른 모습도 투영된 듯하다. 10살짜리 아들을 떠나보낸 영조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듯 상심이 컸다. 훗날 세자의 유품으로 돌아온 이 책을 쓰다듬던 영조는 이 낙서를 마주하며 못 다한 부정(父情)을 달래야 했을 것이다. 영조는 『일한재소재책치부』에 남긴 효장세자의 낙서 두 점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면서, 소중한 애장품으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영조가 이 목록집에 기록한 실물들은 대부분 흩어져 그 행방을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온전히 남은 것은 효장세자의 이 낙서 그림 두 점뿐이다. 성시헌(1567~?)은 본관은 창녕, 자는 군칙(君則)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성해(成諧), 할아버지는 성자제(成子濟), 아버지는 성염(成恬)이다. 1589년(선조 22) 증광시에 생원으로 입격하였고, 1603년(선조 36)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연간에 성균관전적·예조좌랑·병조좌랑·사헌부지평·성균관직강·사간원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연간에 홍문관부수찬·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1613년(광해군 5)에 익사공신 3등으로 녹훈되었다. 인조반정 후에 잠시 파직되었다가 이후 인천부사·이천부사·군기시정·봉상시정·예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