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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Tip.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디지털포천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사진] 명성산 3. 명성산에 얽힌 궁예 전설
억새꽃 축제로 유명한 명성산은 포천 여느 지역보다 궁예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는 곳이다. 우선 ‘명성’이라는 이름 자체도 궁예 패망 관련한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즉 왕건의 군대에 패하여 도망한 궁예는 명성산에 은거하여 성을 쌓고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고 한다. 그러나 왕건의 군대가 명성산 뒤쪽을 포위하자, 군사들 대부분이 명성산 앞 절벽에 떨어져 죽고 궁예는 북쪽으로 간신히 도망하여 부양(斧壤)[지금의 평강]에 이르렀다. 이때 도망하지 못한 궁예의 군사와 그 일족이 온 산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하여 ‘울음산’, 곧 명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북면과 철원군 갈말읍에 걸쳐 있는 명성산에는 망봉(望峰)[혹은 망무봉(望武峰)], 궁예왕굴, 항서받골(降書받골) 등의 지명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한다. 망봉은 궁예가 지금의 산정 호수 좌우로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망원대(望遠臺)를 올리고 봉화를 올렸다는 곳이다. [사진]산정호수 [사진] 망봉산 운악산 연결 항목 명성산 상봉에는 궁예왕굴이 있는데, 이곳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쫓긴 궁예가 은신하였다고 한다. 이 동굴은 2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자연 동굴이다. 항서받골은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다가 항복을 하였다는 곳인데, 원래는 궁예가 왕건 부자로부터 투항의 서한을 받았던 곳으로서, 이후 와전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포천시 화현면 현등산의 홍폭(虹瀑)에도 왕건에게 쫓겨 온 궁예가 피투성이가 된 몸을 씻고 성을 쌓아 저항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명성산을 빠져 나온 궁예는 이후 철원 경계로 들어가 부양 쪽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궁예가 철원 북방으로 패주할 때 한밤중에 왕건 군사의 급습을 받아 싸웠다는 곳이 ‘야전골(野戰골)’이다. 또 이동면 장암 3리의 여우 고개는 왕건 군사들이 명성산에 주둔한 궁예 군사를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이동면 도평 3리의 도마치(道馬峙)는 궁예가 왕건과의 명성산 전투에서 패하여 도망할 때 이곳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산길이 너무 험난하여 이곳에서 말을 내려 끌면서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등의 이야기가 내려온다.
3. 궁예의 미륵 신앙 흔적들
포천 지역에는 미륵 신앙과 관련한 전설도 상당수 전하는데, 이는 궁예의 미륵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정치적 갈등으로 도태된 궁예는 반신라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륵 불국토의 새 세상을 염원하여 미륵불을 자칭하며 미륵보살처럼 금관을 쓰고 가사를 입었다. 반월 산성에 인접한 군내면 구읍리에는 두 구의 미륵 불상이 있다. 하나는 구읍리 석불 입상[포천시 향토 유적 제5호]으로 현재 포천 향교 뒤쪽 언덕에 있다. 2m 크기의 이 석불은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반월 산성을 쌓을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얼굴이 거의 마모되었지만 마을에서는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다. [사진] 구읍리 석불 입 구읍리 석불 입상 연결 항목 또 다른 하나는 구읍리 미륵 불상[포천시 향토 유적 제6호]으로 현재 용화사 법당 내에 봉안되어 있다. 이 미륵 불상에는 ‘신라 시대 어느 날 밤 갑자기 미륵불 남녀 한 쌍이 옥계천을 중심으로 솟아났다’는 전설이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여자 미륵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여자 미륵과 남자 미륵 두 구를 제작한 사례는 경기도 안성의 기솔리에도 있는데, 이 지역에서는 이들 미륵을 궁예 미륵이라 하여 궁예가 세웠다고 한다. 궁예 미륵은 궁예가 양길과 대결한 안성 비뇌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구읍리 미륵 불상은 군내면 하성북리 백석동(白石洞) 지명과 관련이 있다. 이 마을 뒤에 있는 백석을 깎아 구읍리에 있는 미륵 불상 머리에 씌웠는데, 백석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 흰 돌을 허락도 없이 가져갔다고 시비를 걸면서 그 흰 돌을 제 위치에 다시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얼마 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흰 돌이 다시 미륵불 머리에 씌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을 흰돌, 곧 백석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사진]구읍리 미륵 불상 이 밖에 이동면 연곡 4리 뒷둔지[後屯地]에는 벌판 가운데 수목이 우거진 숲 땅속에 미륵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있다. 한때 젊은 사람들이 이 미륵을 파서 세우려고 하자 마을 노인들이 이것을 파서 세우면 마을 아낙네들이 바람이 난다고 만류하여 발굴 작업이 중단되었다고 전한다. 미륵 불상이 땅속에서 솟아오른다는 것은 곧 세상에 미륵불이 출현하였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마음에서 미륵 불상을 만들어 땅속에 묻어 두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추측된다. 이처럼 포천 지역에 미륵불과 관련한 전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은, 궁예의 근거지였던 철원과 인접해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구읍리 미륵 불상 연결 항목 디지털포천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TIP)『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와룡암이라는 이름은 바위의 모습이 누워 있는 용처럼 생겼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바위의 이름은 고려 시대의 문헌에도 나와 있다. 용의 상체는 수면 위로 떠 있고 꼬리에 해당하는 바위는 길이가 50m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홍수 예방 조치로 물속에 잠겨서 바위를 더 이상 볼 수 없다. 8. 백로주(白鷺洲) 영평 8경 중 제7경으로,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거사리 한내천 하류에 있는 바위와 그 주변이다. 백로주는 바위라기보다는 조그마한 바위산이라 할 수 있는데, 전체가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져 마치 백로가 물속에 서서 사방을 바라보는 형상을 연상시킨다. 백로암이라는 이름이 약 400년 전 문헌에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훨씬 전에 지어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최근 백로주 북쪽 하천 부지에 잔디와 나무를 심고 유원지를 조성하였다. [사진] 백로주 백로주는 양사언, 양만고, 조경, 송시열 등 포천 지역의 명사들이 와서 배를 타고 즐겨 놀던 곳이며, 현재도 포천의 대표적인 휴양지이다. 바위에는 당나라 시인인 이백(李白)[701~762]의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의 제5, 6구가 새겨져 있다. 이밖에도 4점의 암각문이 새겨져 있다. 백로주 암각문 연결 항목 바로가기 [사진] 백로주 암각문 백로주 유원지 연결 항목 9. 청학동(靑鶴洞) 영평 8경 중 제8경으로,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금주리에 있는 계곡이다. 일동면으로부터 흘러내려온 물을 암석 병풍과 같은 형태의 절벽이 둘러싸고 있다. 큰 바위와 절벽이 있이 하천과 함께 어우러진 경치를 보여준다. 청학동의 명칭과 관련해서는 설화가 전한다. 어떤 가난한 효자가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이장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한 삽을 뜨는 순간 그 속에서 청학 한마리가 나와 슬프게 울며 창공에 원을 그리면서 날아가서 효자가 그곳에 산소 쓰기를 단념했다고 한다.
암벽 낭떠러지에는 ‘청학동(靑鶴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진] 청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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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포천문화대전」속으로의 여행(2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전자 편찬 사업『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 중 경기도 포천 지역 정보를 총망라한「디지털포천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사진] 디지털포천문화대전 홈페이지 그럼 포천에 대해 알아보는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궁예의 못다 이룬 한이 남아 있는 포천의 유적들] 궁예와 관련한 포천 지역 설화에는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궁예 관련 설화들은 포천 지역 외에 본거지인 철원과 안성 지역에도 널리 퍼져 있는데, 대략 안성에는 성장기, 철원에는 전성기, 포천에는 몰락기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궁예의 못 이룬 꿈을 유적과 이야기들을 따라서 찾아가 보자. 후삼국 시대 궁예(弓裔)가 세운 태봉(泰封)의 수도는 강원도 철원이었다. 포천 지역은 철원과 인접한 지리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태봉의 정치적, 군사적 요충지 중에 하나였다. 
현재의 포천시 관할 지역 중 가장 북쪽에 있는 관인면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철원과 연천에 속해 있다가 1983년에 포천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즉 후삼국 시대에는 궁예의 세력권인 철원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포천 지역에 관련 유적·유물이 남아 있고, 궁예와 관련한 이야기가 이들 유적뿐 아니라 산·고개·바위 등 지명 등에 전해 오고 있다. 1. 반월 산성과 남창동
후삼국 시대 포천 지역의 중요성, 특히 태봉의 수도와 관련한 전략적 중요성은 반월 산성과 남창동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반월 산성은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해발 284.5m의 청성산에 축조된 반월형의 테뫼식 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1,080m이다. 전체적인 형상이 반달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반월산성이라고 불리는데, 포천 지역은 물론 인근 지역에 있는 산성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이 성의 축성 시기와 용도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1994년 지표 조사, 1995년~2001년까지 6차에 걸친 발굴 조사와 2차의 성벽 조사를 통해, 백제에 의해 축성되어 삼국 시대는 물론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활용되었음이 밝혀졌다.
[사진] 반월성 전경 한편, 반월 산성을 궁예와 관련하여 이해하는 주장들도 있다. 궁예 정권 초기에 축성되어 궁예가 양길(梁吉)과 패권을 다투는 동안 거의 최전선의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또한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한 뒤 쌓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궁예가 태봉을 건립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여 남으로 신라, 서남으로 견훤(甄萱)의 후백제와 대치할 때 그 부장(副將)이 축성하였다는 것이다. 축성 주체와 시기에 대해서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유보하더라고, 후삼국 시대 궁예의 태봉에 의해 증축 혹은 보완되었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진] 반월성 성벽 포천시 관인면 초과 2리 남창동의 지명 유래에는 후삼국 시대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이 지역에 궁예가 군량미를 저장하기 위해 큰 창고[남창]를 지었으며 이것이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남창뿐 아니라 북창(北倉), 사창(司倉)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를 연결하여 보면 궁예 정권이 패서도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반월 산성과 함께 군창을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포천 반월성 연결 항목 초과리 연결 항목 바로가기 2. 궁예의 마지막 자취
포천 지역에는 특히 궁예의 패망과 관련한 사연을 간직한 곳이 많다. 포천시 일동면 화대리 강씨봉은 궁예의 부인 강씨가 날로 과격해지는 궁예의 폭정을 직간하다 유배를 당한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강씨는 강씨봉으로 유배된 후 곧 사망하였는데, [사진] 국망봉 왕건에게 패한 궁예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강씨를 찾았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회한과 자책의 마을을 품고 돌아서 올라선 곳이 포천시 이동면 연곡리·장암리와 가평군 북면 적목리 경계에 있는 국망봉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도성 철원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국망(國望)’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 이야기는 현재 역사 자료에 기록된 내용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또한 강씨봉과 국망봉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강씨봉은 왕건이 궁예와 전쟁을 벌일 때 강씨가 피난하여 터를 잡아 살았다거나, 산 주변에 강씨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국망봉은 궁예와 왕건이 싸울 때 궁예의 부인 강씨가 이곳으로 피난을 와 토굴을 파고 살면서 철원을 바라보았다거나 궁예가 어릴 적에 철원을 바라보며 도읍지로 점찍었다고 하는 약간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마치 볏짚 단을 쌓아올린 것 같은 형상이어서 화적(禾積)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또다른 이름으로 유석향(乳石鄕), 귀룡연(龜龍淵)으로 불렸다. 조선 시대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여지도서』 경기도 영평현조에는 기우제단 두 곳 중 하나로 화적연이 나오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도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사를 종종 확인할 수 있다. 강씨봉 연결 항목 국망봉 연결 항목 포천 지역에는 궁예가 왕건에게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이야기가 전래되고 있다. 역사적 여부는 입증할 수 없지만 이야기를 통해 궁예의 마지막 자취를 추적해 보면 관인면 보개 산성→영중면 성동리 산성→영중면 파주골→영북면 명성산→이동면 도마치→강원도 평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천시 관인면 중리 보개산에는 궁예가 철원에서 왕건에게 쫓겨 와 쌓은 성터라고 이야기되는 보개 산성 터[보가산 성지]가 남아 있다. 보가산 성지는 둘레 약 4.2㎞이고, 형태는 남북이 동서보다 두 배 이상 긴 변형된 사변형 모양이다. 산성의 대부분은 파괴되었고, 현재는 서벽 중에서 네 곳에 불연속적으로 석축이 남아 있으며, 북벽의 10여 곳에도 성벽이 불연속적으로 남아 있다. [사진] 보가산 성지 산성의 동쪽과 남쪽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성벽을 축조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석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서벽으로 특히 세 계곡을 차단하고 있는 성의 길이를 합하면 75m에 해당된다. 그리고 문 터 1개소, 우물 1개소, 추정 건물 터 2개소 등이 확인된다.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에는 이 성을 ‘궁예 대왕 각대성지(弓裔大王閣岱城址)’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궁예의 큰 건물이 있던 곳’이라는 뜻이다. 현재 성안에는 ‘궁예 왕 대궐 터’나 ‘궁예 왕 우물 터’ 등으로 전해지는 흔적이 있다. 보가산 연결 항목 바로가기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의 성동리 산성[태봉 산성 터] 또한 궁예가 축성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918년(태조 1) 왕건의 군대에 쫓기던 궁예가 하루 저녁 숙영하기 위하여 백성과 군사를 동원하여 북강(北江)[현 한탄강]에서 이 성까지 일렬로 서서 손에서 손으로 돌을 전달해서 쌓았다고 전한다. 사실 이 성안에 조선 순조의 세자 익종의 태(胎)[탯줄]를 안치한 태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생겨났다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이 이야기는 주변의 궁예 관련 설화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동리 산성 연결 항목 바로가기 정자 현판은 양사언의 글씨이며 정자 옆에는 그의 시조 비인 “태산이 높다하되…”가 서 있다. 주변에 여러 암각문이 남아 있는데 양사언과 석봉 한호(韓濩)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 금수정 연결 항목 바로가 「디지털포천문화대전」에 담긴 정보와 자료들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사이트 및 지역별 사이트(포천문화대전),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11년 3월부터 2013년 9월까지 약 2년에 걸친 작업 기간을 통해 원고 집필, 멀티미디어 제작, 서비스 시스템 구축 사업이 진행되었고, 총 1,983개의 항목, 원고지 10,470매, 사진과 동영상 등 총 3,500종의 멀티미디어 자료를 담고 있습니다.  2011년 3월 포천시와의 협약을 통해 추진된 이 사업은 2011년 6월부터 11월까지 ①기초 조사 연구를 통해 포천시의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ㆍ분석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②원고 집필 사업(2011년 12월~2012년 9월, 국민대학교), ③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사업(2011년 12월~2012년 11월, 포천문화원), ④원고 윤문․교열 사업(2013년 3월~5월, ㈜지식공학), ⑤XML 데이터 제작 사업(2013년 4월~6월, ㈜나라지식정보), ⑥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2013년 5월~6월, ㈜올인텍아이엔씨)이 수행되었습니다. 「디지털포천문화대전」(http://pocheon.grandculture.net)은 경기도 포천시의 디지털 백과사전으로, 포천시의 지리, 역사와 문화를 비롯해 정치·경제·사회의 발전상 등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정보를 집대성해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불일폭포 연결 항목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