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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9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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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딸과 사위 [사진] 영조의 딸과 사위 표지 지음: 지두환 /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발행일: 2014.08.29/ 정가:12,000원 / 쪽수: 154쪽/ 판형: 국판/ 역사, 조선시대 / ISBN:978-89-7105-992-0-03910 도서 소개 영조 대는 노론이 주도하면서 소론, 남인과 연합하는 탕평책을 쓴 시기였다. 그래서 영조는 부마 집안으로 경주 김씨 김한신, 영일 정씨 정치달, 반남 박씨 박명원, 평산 신씨 신광수, 창원 황씨 황인점, 청송 심씨 심능건, 능성 구씨 구민화를 선택하였다. 이러한 영조의 딸과 사위는 영조가 조선 성리학으로 문예 부흥기인 진경 시대를 꽃피우는 것을 주도하고 다음 시대인 정조가 북학 사상기를 끌어가는 것을 주도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노론 핵심 세력으로 활동하면서도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화변을 둘러싸고 두 세력으로 갈렸다. 이 책은 영조의 가족, 그 중에서도 딸과 사위를 중심으로 영조 시대에 어떻게 활동하며 이끌고, 영조를 보좌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저자 소개 “영조가 앉아 있는 자리, 술잔을 올리고 있는 관리, 왕세자의 자리, 영조가 먹는 술 항아리, 왕세자가 먹는 술 항아리 등 각자가 먹는 음식이나 술 항아리, 자리 등이 예법으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고, 그 모든 것들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도화서의 화원들이 그렸습니다. 특이점은 이런 그림들이 현장에서 그려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화원들은 오랫동안 기록화를 많이 그렸기 때문에 나름대로 전해오는 견본도 있었을 것이고, 또 국조속오례의 등 예법에 따라 잔치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탕으로 그렸죠.” 그런데 이 자세하게 묘사된 그림을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어디에도 왕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주인공이 그려져 있지 않은 그림이라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 “조선시대 기록화의 특징은 왕과 왕족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록화는 행사에 참여했던 신하들이 기념으로 만들었던 것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왕의 모습은 정해진 공간에서 제관이나 왕족 등 허락된 신분의 사람들만 볼 수 있는 지존의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집에 사적으로 보관하는 그림에 왕의 얼굴을 그릴 수는 없었고, 왕의 자리에는 상징물로 대신하여 그려 넣었습니다.” 차례 1부 영조의 일생과 그의 가족/2부 화순옹주와 월성위 김한신/3부 화완옹주와 일성위 정치달/4부 화평옹주와 금성위 박명원/5부 화협옹주와 영성위 신광수/6부 화유옹주와 창성위 황인점/7부 화령옹주와 청성위 심능건/8부 화길옹주와 능성위 구민화/나가면서 영조의 딸과 사위, 문예 부흥기를 이끌다 영조는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오랜 52년간 재위하면서 르네상스에 비견될 만큼 조선의 중흥기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영조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영조를 대왕이라 높여 부르기도 한다. 영조는 정치적으로 철혈의 군주였지만, 학술과 문화를 좋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이었다. 재위 기간 부지런히 정사에 힘쓰며 나라를 걱정하기 바빴고 반란과 정통성 시비를 겪으면서도 군주로서의 중심을 잃지 않고 개혁 정치를 추진하면서 화합의 리더십을 몸소 보여주었다. 특히 영조 스스로 자신을 대표하는 업적으로 거론한 탕평, 균역, 준천 등의 육대 사업은 나라 안의 묵은 폐단을 씻어내고 민생의 질을 높이기 위한 애민의 마음이 담겨 있다. “영조 시대의 조선” 시리즈 소개 [사진] 역사 영화나 드라마에서 재연되었던 왕실 잔치 역사 영화나 드라마에서 재연되었던 왕실 잔치를 떠올리면 화려하면서 엄숙하고 각이 작힌 모습이 쉽게 떠오른다. 게다가 남아있는 그림들을 보아도 절도 있고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현장의 분위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는 것이 흥미롭다. “실재 궁중 잔치 행사장은 혼잡하고 질서가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간이 마루 아래의 땅이 좁아 군병, 의장군을 세워 둔 나머지 공간은 상을 들고 돌아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자리가 좁았습니다. 또 마루 아래 며칠 동안 숨어 있다가 몰래 들어오는 자들도 있었고, 떠드는 사람도 많았죠. 이 때문에 영조는 잡인이나 떠드는 사람을 통제하라는 명령을 특별히 내리기도 했습니다.” <숭정전갑자진연도병>, <영조병술진연도병> 등을 살펴보면 현장감이 넘치고 세밀하게 잔치의 상황이 그려져 있다. 이렇게 복잡한 그림들은 누가, 어떻게 그렸을까. “조선시대 궁중회화는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해 남긴다는 목적으로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에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영조는 임진왜란 이후 끊겨버린 여러 예와 법에 대한 명맥을 재건하고, 침체된 국가 분위기를 되살리는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왕실에서 다양한 잔치가 열렸고, 때문에 다양한 궁중회화가 남아있습니다. 조선시대 회화의 전성기라고 불리는 영조 대의 잔치 그림을 살펴볼까 합니다.” 어쩐지 왕실에서는 잔치가 자주 열렸을 것 같다. 화려한 왕가의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일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왕실에서는 말만 하면 술상이 뚝딱 마련되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국가의 잔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궁중에서 열리는 잔치는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무용을 즐기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은 유교의 예와 음악을 구현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고, 또 잔치 주인공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거나 왕실의 위상을 높이는 등 목적성이 있는 자리였죠. 그래서 왕권이 강화되던 시기에 더 다양한 잔치가 열렸습니다.” 홍익대학교에서 진행되는 강의 시간 동안 우리는 다양한 그림을 보며 조선 왕실의 잔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박정혜 교수의 강의는 다소 생소한 용어가 많은 궁중회화에 거리감을 좁혀준다. 이제는 궁중회화를 낯설게 보기 보다는 한 번 더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저자의 󰡔영조 대의 잔치 그림󰡕을 펼쳐 보면 직접 보기 어려운 그림과 함께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