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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9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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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이 좋아하는 음식, 인간(人間)이 좋아하는 음식. [사진] 정은주 (장서각 국학자료연구실) 많은 사람에게 제사에 대한 추억은 제상에 올려진 제물(祭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제상의 음식은 어린 마음을 혹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부엌에서 나는 음식의 향내는 신을 부르기에 앞서 산 자의 후각을 깨웠으며, 희미한 촛불 아래서도 과실과 떡, 고기 음식은 빛을 발했습니다. 굶어죽은 사람도 아닌데 조상들은 왜 그렇게 먹거리에 집착할까? 신이 정말 먹는 것일까? 음식이 없는 제사가 가능할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제사를 바라보면 제사의 전반적인 과정이 음식과 연관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국가 제사에서도 제물을 준비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장서각에 소장된 자료 중에는 제물에 관한 내용이 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봉상시(奉常寺)에 편찬한 『태상지(太常誌)』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봉상시는 국가 제사를 거행할 때면 제물을 공급하는 관서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의하면 조선시대 국가 제사는 제물에 따라 희생(犧牲)을 올리는 제사와 유밀과(油蜜菓)를 올리는 제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국가 제사를 일반적으로 ‘혈식(血食)’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국가 사전이 희생을 도살하여 바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진] 종묘 이렇게 희생을 준비하는 제사를 정제(正祭)라 부릅니다. 조선시대 사전 중에서 혈식의 모습을 가장 섬세하게 보여주는 것이 종묘의 제향입니다. 희생을 맞이하여 살피는 것이 의례의 과정에 포함되어 있고, 도살한 희생을 모혈(毛血)과 간료(肝膋, 간과 발기름), 날고기, 익힌 고기 등으로 나누어 제상에 올립니다. 반면 왕릉제는 희생을 일체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유밀과라는 전통 음식이 중요합니다. 유밀과는 곡분을 주원료로 하고 기름[油]과 봉밀(蜂蜜)을 이용하여 만든 음식으로 조과류(造果類)의 일종입니다. 왕릉의 제상에는 중배끼[中朴桂], 홍산자(紅散子)와 백산자(白散子), 다식(茶食) 등의 유밀과가 앞쪽에 있고, 그 뒤로 과일, 떡, 탕과 국수 등이 놓입니다. 이렇게 희생 대신에 유밀과를 올리는 제사를 종묘의 정제(正祭)와 구분하여 속제(俗祭)라 하였습니다. 왕릉의 제상은 조선전기 당시 유행하거나 익숙한 것을 따랐기에 그때의 음식 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왕릉 제향에서 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 역시 조선 초기 불교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중국 고대를 모델로 한 제사 형식에서 우리나라 토착적인 형식을 보존하여 전승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혈식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 먹는 음식이라 여겼습니다. 상례(喪禮)를 모두 바치고 종묘에 모셔진 선왕은 이제 인간이라기보다 그 공덕에 힘입어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를 위한 제사가 혈식입니다. 그러나 혈연으로 연결된 선왕은 초월의 신이기 이전에 늘 가까이하던 가족이고 친척입니다. 생전에 못 다한 봉양이 한스럽기에 이 세상 사람이 좋다는 것을 해주고 싶습니다. 제사에는 이렇게 산 자의 욕망을 넘어선 초월성과 삶의 연속성이 공존합니다. [사진] 왕릉진설 이제 임청각의 사람들은 500년을 지켜온 임청각과 임야 1만 2천여 평을 국가에 헌납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임청각이 단지 일개 가문의 종택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자 독립운동의 역사 현장으로서 대한민국의 산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석주선생의 자손이 일제의 호적을 거부함에 따라 4인의 친족에게 명의 신탁되어 70년간 방치됨으로써 불분명해진 소유권이 발목을 잡고 있다. 비슷한 시기, 다른 한 편에서는 송병준과 이완용 등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토지환수소송을 제기하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불의에 영합하고, 개인과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권력에 복무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이 되고, 부와 권력을 누린 이들의 토지였다. 이제는 탐욕과 방종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석주선생과 임청각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명가로서의 가치 때문은 아닐까? [사진] 산자와 산자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