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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9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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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TIP)『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김천의 소리와 몸짓, 금릉빗내농악 연결 항목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김천시에서는 김천 지역 역사와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는 빗내농악의 보존과 전승을 위해 빗내농악전수관을 건립하고, 빗내농악 전승 학교 지정 사업을 전개하며, 빗내농악 경연 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빗내농악보존회 지원 등 다방면에 걸친 지원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빗내농악전수관은 2003년 11월 빗내농악의 발상지인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 입구에 건립되어 광활한 개령들과 감천 내를 굽어보고 있다. 부지 면적 3388㎡에 지상 2층 규모의 전시실과 연습실, 숙소, 야외 공연장을 갖추고 연중 빗내농악 전승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김천의 소리와 몸짓, 금릉빗내농악김천 역사의 원류 감문국 연결 항목 바로가기 잊혀진 왕국, 감문국의 부활 관련 영상 바로보기 [사진] 잊혀진 왕국, 감문국의 부활 관련 영상 화면 김천 역사의 원류 감문국 삼국 시대 이전에 성립되었던 대부분의 소국이 그러하듯 감문국(甘文國) 또한 1700여 년의 풍상 속에 대부분의 유적이 훼손되고 멸실되어 그 흔적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다. 따라서 감문국의 실체에 접근하는 방법은 제한된 사료(史料)와 전설, 문학 작품 등에 나타난 한정된 관련 자료를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1990년 공단 부지 조성 과정에서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 변에 위치한 구성면 송죽리 일대에서 신석기와 청동기, 철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층위적(層位的)으로 형성된 취락 구조가 발견되면서 감천의 중하류에 위치했던 감문국의 건국 주체와의 관련성이 새삼 주목 받기도 했다. 구성면 송죽리 감천 변에서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유물이 대량 출토되고, 같은 감천 유역인 개령면과 감문면 일대에서 동시대의 대표적인 묘제(墓制)인 고인돌이 집단으로 발견되고 있는 것은 좋은 예이다. 감문국은 기원전후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많은 읍락 국가 중 하나다. 감문국의 건국 주체는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에 걸쳐 감천 유역에 산발적으로 집거(集居)하던 토착민들이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의 전환기 무렵 인구의 증가 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생산 기반을 가진 감천 중하류인 개령·감문 일대로 이동해 주변의 읍락을 통합, 흡수해 형성한 읍락 국가로 볼 수 있다. 결국 감문국은 감천의 중하류에 위치하여 비옥한 충적 평야를 기반으로 기원전후 1세기경 성립되어 정치적 성장을 꾀했으나, 고대 국가로 성장하기 전 단계에서 여타 소국에 비해 일찍이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사로국, 즉 신라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진] 감문국 궁궐터 [사진] 취적봉 감문산성 터 [사진] 감문국 궁궐 초석 [사진] 궁궐터인 동부연당 [사진] 금릉빗내농악 빗내농악의 체계적인 연구와 선양에 앞장서고 있는 빗내농악보존회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빗내농악보존회는 1984년 12월 빗내농악이 ‘금릉빗내농악’이란 이름으로 경상북도 무형 문화재 제8호로 지정됨과 동시에 창단된 후 전국의 풍물 대회와 각종 행사에 참가하여 김천 농악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빗내농악은 김천 지역을 대표하는 풍물로서 감문국 시대 군사들이 진영(陣營)을 펼치고 조련하는 과정과 전쟁에 출전하거나 개선할 때 군사들을 위로하는 연희의 성격이 담긴 군사굿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아울러 김천 지역 소국의 맹주였던 감문국이 아포국, 주조마국, 어모국, 배산국, 문무국 등 주변 읍락을 다스리고 단합을 과시하기 위해 나라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나라 제사가 동제사의 형태로 면면히 계승되어 왔다고도 한다. 빗내농악의 발상지로 일컬어지는 빗내마을은 감문국의 읍치인 개령군 동부리와 양천리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감문국이 여타 소읍락을 거느리는 국읍으로서 제천 행사를 주관하던 제례 의식이 군사 조련과 결합되어 전국 유일의 군사 농악, 즉 진굿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진] 빗내농악전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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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도 울고 넘는 추풍령 연결 항목 [사진] 1970년대 추풍령휴게소 다리 [사진] 추풍령 「디지털김천문화대전」속으로의 여행 1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사업『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 중 경상북도 김천 지역 정보를 총망라한 「디지털김천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그림]「디지털김천문화대전」홈페이지 화면 「디지털김천문화대전」(http://gimcheon.grandculture.net/)은 경상북도 김천시의 디지털 백과사전으로, 김천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한 모든 정보를 집대성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누구든지 이를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2009년 2월 김천시와의 협약을 통해 추진된 이 사업은 2009년 3월부터 같은 해 8월까지 기초조사 연구를 통해 김천의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ㆍ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일반ㆍ기획 항목 집필 사업(2009년 12월~2010년 8월, 대구사회연구소), 마을지 제작 사업(2010년 3월~11월, 한빛문화재연구원),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사업(2010년 8월~2011년 2월, ㈜르네틴트), 원고 교열ㆍ윤문 사업(2010년 8월~11월, ㈜휴머니타스), XML 데이터 제작 사업(2011년 5월~7월, ㈜지식공학), 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2011년 6월~8월, ㈜올인텍아이엔씨), 모바일 서비스 개발 사업(2011년 7월~8월)이 수행되었습니다. 2009년 2월부터 2011년 8월까지 약 2년에 걸친 작업 기간을 통해 기초조사, 원고 집필, 교열‧윤문,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XML 데이터 제작, 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 모바일 서비스 개발 사업이 진행되었고, 총 1,982개의 항목, 원고지 14,983매, 사진과 동영상 등 총 4,572종(마을지 포함)의 멀티미디어 자료를 담고 있습니다. 디지털 콘텐츠로 구축된 정보는 지역별 사이트와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이용자들이 손쉽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김천에 대해 알아보는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삼산이수의 고장, 김천 예부터 김천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왔다. ‘삼산이수’란 세 개의 산과 두 개의 물이라는 의미이니, 이는 곧 산과 물로 대표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비유한 것이다. 김천을 대표하는 삼산(三山)은 황악산·금오산·대덕산이며, 이수(二水)는 감천과 직지천을 가리킨다. 삼산이수는 김천 지역이 금릉(金陵)으로 불렸던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금릉은 오랫동안 김천 지역의 별호(別號)로 불렸으나, 1949년 김천군 중 김천읍을 분리하여 김천시로 승격시키면서 나머지 지역을 묶어서 금릉군으로 행정 구역을 개편했다. 이태백의 「등금릉봉황대」와 최호의 「등황학루」는 김천 지역의 대표적인 여러 지명들의 유래를 제공했는데, 바로 금릉·삼산이수·봉황대·황학산·방초정 등이 그것이다. 조선 후기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양대 거장 이태백과 최호의 시를 흠모하던 김천 지역 사대부들이 이와 같은 지명을 빌려 왔던 것으로, 당시의 가치관으로서는 충분히 가능했던 일이다. 금릉은 원래 중국에 있는 지명이다. 서기 314년 건국한 중국 동진이 원래 ‘건업’이라 불리는 곳에 도읍을 정하고 ‘금릉’이라 했는데, 그 후 나라가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금릉은 계속 도읍으로 기능하면서 유적이 많고 경관이 아름다운 고도(古都)가 되었다. 그리하여 역대 많은 시인이 금릉의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며 시제에 올렸는데, 대표적인 시가 이태백의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 즉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이다. 이 시는 이태백이 최호(崔顥)의 「등황학루(登黃鶴樓)」, 곧 「황학루에 올라」라는 시에 감복하여 지었다고 한다. [사진] 감천 [사진] 황악산 -삼산(三山) [사진] 금오산이수(二水) [사진] 대덕산 [사진] 직지천 [사진] 황산에서 바라본 100년 전의 김천 [사진]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구름도 울고 넘는 추풍령삼산이수의 고장, 김천 연결 항목 바로가기 추풍령(秋風嶺)은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과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높이는 221m이다.추풍령은 예로부터 영남 지방과 중부 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경부선의 개통으로 조령(鳥嶺)을 통과하던 교통량이 모두 추풍령으로 흡수되어 추풍령역이 개설되었으며 그에 따라 촌락이 크게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남 지방과 충청도 지방의 지역 간 교류에 큰 몫을 하였다. 특히 경부고속국도가 개통되면서 추풍령은 경부고속국도의 중간 지점에 해당되어, 추풍령휴게소와 여러 부대시설이 설치되었고, 여행객의 휴식처로 변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추풍령은 임진왜란 때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경상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의 비장(裨將)이 되어 부하 수천 명을 거느리고 추풍령에서 왜군 2만 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적군을 물리쳤으나, 다시 금산(錦山) 방면에서 진격하여 오는 구로다[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의 협공을 받아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사진] 추풍령 휴게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