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칼럼

어머니의 이름으로, 궁원제(宮園制)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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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선임연구원

조중회를 팽형(烹刑)에 처하라.


   1743년(영조 19) 11월 29일, 정언 조중회(趙重晦, 1711~1782)의 상소를 읽은 영조는 책상을 내리치며 눈물을 흘렸다. 상소에는 영조가 생모인 숙빈 최씨에 대한 인정을 우선하여 예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이 담겨 있었다. 영조는 자신이 종묘와 숙빈의 사당인 사묘(私廟)의 의례를 엄격히 구분했음을 강조하면서, 조중회의 비판을 자신과 숙빈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이에 세자에게 선위할 것을 선언하며 “조중회를 팽형에 처하여 내 마음을 위로하기를 바란다.”라고 압박했다. 팽형은 삶아 죽이는 가혹한 형벌로서 탐관오리를 일벌백계하는 수단으로 강조되었는데, 영조는 팽형을 통해 자신의 격노를 드러내고자 했다.


3종의 『궁원식례(宮園式例)』를 편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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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는 궁원제를 제도화하는 규정집으로 『궁원식례』를 편찬했다. 장서각에는 육상궁‧소령원에 관한 3종의 『궁원식례』가 소장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756년(영조 32) 6월 28일에 영조는 『궁원식례』를 ‘원편(原編)’, ‘보편(補編)’, ‘정본(定本)’으로 구분하고 원편과 보편을 교정하여 정본으로 간행토록 명했다. 이러한 3종의 『궁원식례』를 통해 궁원제의 정비와 변화에 반영된 영조의 지향을 확인할 수 있다.


   원편인 『육상궁소령원식례』(K2-2474)는 1753년 6월 25일 궁원제 선포 이후 약 20일 만에 완성되어, 7월 16일 육상궁에 봉안되었다. 그런데 원편의 편찬 직후부터 새로운 의례가 보완되면서, 8월 20일에 수정 초본(草本)이 마련되었다. 영조는 새로운 규정을 보완하여 원편과는 별도의 책으로 󰡔궁원식례보편󰡕을 편찬하게 하였다. 9월 24일에 영조는 󰡔궁원식례보편󰡕을 검토한 후 “이제는 내 마음에도 꼭 맞는다.”고 평가했다. 또한 10월 22일에는 축식에서 숙빈의 호칭을 ‘사친(私親)’이 아닌 ‘선자친(先慈親)’으로 변경하는 등 궁원제의 정비를 계속했고, 11월에 보완된 규정을 수록한 『궁원식례보편』(K2-2427)이 완성되었다.


   원편과 보편의 구체적인 차이를 살펴보면, 원편은 세자의 사당을 기준으로 종묘의 정제(正祭)와 구분되는 속제(俗祭)의 형식을 따랐다. 속제는 왕실 조상에게 생시처럼 효를 다하기 위한 제사로서, 신에게 바치는 희생(犧牲)인 생고기 대신 일상의 음식인 유밀과(油蜜果)를 올렸다. 또한 ‘작(爵)’ 대신 ‘은잔(銀盞)’을 사용하고 폐백(幣帛)을 생략하는 속제의 원칙을 준수했다. 반면 보편의 경우, 육상궁 제사에서 종묘와 동일한 ‘작’을 사용하고, 술항아리인 이(彝)·준(尊)·뢰(罍)의 배치 역시 종묘의 방식을 따랐다. 또한 폐백을 추가하여 일반적인 속제와 차등을 두었다. 이러한 보편의 규정은 속제를 기본으로 하되, 종묘 정제의 요소를 절충하여 궁원제의 의례적 위상을 높이려는 영조의 지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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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좌) 원편의 진설도   (우) 보편의 진설도
*원편과 보편의 비교   ①:은잔에서 작으로의 변화   ②: 폐백의 추가   ③: 이·준·뢰의 배치


   정본인 『육상궁소령원식례』(K2-2476)는 1756년(영조 32)에 원편과 보편을 통합하여 교정한 후 실록자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숙빈의 호칭은 ‘선비(先妣)’로 일괄 수정되었다. 사망한 어머니를 지칭하는 ‘비(妣)’는 사망한 아버지인 ‘고(考)’와 짝을 이루어 적통을 의미하기 때문에, 후궁인 생모에게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조는 1755년 12월에 『주례(周禮)』를 근거로 숙빈의 호칭을 ‘선비(先妣)’로 변경했고, 이러한 결정은 정본 『궁원식례』를 통해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었다. 그럼에도 ‘선비’는 왕후의 호칭인 ‘황비(皇妣)’와는 구분된다는 점에서 영조는 적통과의 구분이라는 원칙을 준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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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좌) 원편의 ‘사친’   (중앙) 보편의 ‘선자친’   (우) 정본의 ‘선비’


어머니의 이름을 드러내다.


   영조는 ‘화경’을 시호로 올리고 궁원제를 선포한 이후에도, 1756년에 ‘휘덕(徽德)’, 1772년에 ‘안순(安純)’, 1776년에 ‘수복(綏福)’의 시호를 추가로 올렸다. 이러한 시호를 반영하여 팔고조도를 제작하고 육상궁에 봉안했다. 팔고조도는 자신부터 4대(代)까지의 조상을 소급하여 8명의 고조부를 기록한 가계도이다. 영조는 최초로 왕후와 생모의 계통을 구분하여 2종의 팔고조도를 제작했다. 사친의 일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하들을 비판하면서, “내가 만약 지나치게 행동한다면 숨기는 것이 옳지만, 지나치지 않음에도 숨기고자 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반박했다. 이러한 영조의 결정에 따라, 생모인 후궁과 그 조상들이 팔고조도에 기록되었다. 이후 영조는 시호를 더해 위상을 높인 숙빈의 이름으로 팔고조도를 제작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효를 다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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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열성팔고조도』(K2-1065)
(좌) 화경휘덕안순수복숙빈최씨(和敬徽德安純綏福淑嬪崔氏)   (우) 비 인원왕후김씨(妣 仁元王后金氏)


   영조의 사모곡이 깃든 궁원제와 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이야기는 오는 9월 22일 개막하는 2025년 장서각 기획전 ‘칠궁, 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에서 다채로운 전시 자료와 함께 새롭게 조명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