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캠퍼스
두 번째 입학, 두 번째 졸업을 목표로
'코리아'를 아는 것

언제부턴가 매일 아침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을 읽으며 모르는 세계의 다양한 일들을 알게 되는 것이 내게 큰 재미가 되었다. 종이를 펼쳐도 불과 1평방미터도 안 되는 종이 속 가득히 담긴 일본과 세계의 다양한 정보를 접하며 나는 '세계'를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학부 시절에는 기자를 꿈꾸며 저널리즘에 대해 배웠었다. 기본은 '현장'ー어떤 일도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것, 그것이 저널리즘의 기본이라고 믿었던 나는 시간과 돈이 생기면 내 나름의 '현장'을 찾아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 도전했다. 그 중 하나가 코리아를 아는 것이었다.
2002년이 하나의 전환점이었던 것 같다. FIFA 월드컵의 한일 공동 개최와 북-일 정상회담. 이 두 가지 큰 사건을 계기로 '두 개의 코리아'와 일본의 관계가 연일 언론에서 거론되었다. 월드컵 공동 개최에 따른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인 납치 문제'로 인해 북한에 대한 일본의 여론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일본과 한국, 그리고 북한에 가로놓인 역사적 배경에 기인한 다양한 이슈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대학교 졸업 후에는 작은 잡지사에 취직해 주간지 현장에서 편집 기자로 활동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생활 등 다루는 분야는 다양했지만 관심이 많았던 남북한 관련 기획에 주력해 왔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 침략전쟁으로 인한 전후배상이나 과거사 등 정치적, 사회적 갈등과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이렇게 표현돼 온 것처럼 한국과 일본, 또한 북한과 일본은 국가 간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서로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무엇을 어떻게 전하면 좋을까. 그때마다 전문가, 관계자, 당사자를 취재해 왔는데, 이런 과정은 점점 더 전문적으로 한국의 사회문화를 배우고 싶다는 욕심을 내가 갖게 해줬다.
  무엇보다도 한국을 직접 보고 경험해 보고 싶었다. 물론 직장은 떠나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니었지만 도전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도전하고 후회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한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현장을 한국으로 옮기고: 낯선 곳에서 나, 그리고 너를 만나다

[그림 1]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아름다운 사계절, 봄·여름·가을·겨울 모습
  '인류학(자)'은, 여러 '현장(필드)'에서 온갖 일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사건에 직접 관여하려고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류학전공 석사과정에 입학하면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다. 필드워크라는 조사방법을 이용하여 인간사회의 여러 가지 사건의 의미, '왜, 어떻게'를 생각하고 그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나 커뮤니티에 들어가 함께 생활함으로써 커뮤니티나 사람들의 생활권 안쪽에서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인류학의 큰 특징 중 하나다. 여기서 ’다른 문화’란 먼 나라나 다른 민족에 국한되지 않는다. 도시와 지방, 계급, 젠더, 장애를 가진 사람, 혹은 외국인이거나 우리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도 포함된다. 인류학은 일견 무관해 보이는 것을 비교 대상으로 삼거나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는 사물의 분리 방식과는 다른 틀을 가져와서 생각한다. 또한 이치뿐 아니라 현장에서 자신의 몸에 생긴 위화감이나 변화도 눈여겨 본다. 현장의 사람들의 느끼는 방법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자신이 몸에 지니고 온 것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인류학'이란 나의 신체를 도구로 삼아 '타자'를 이해하려고 하며 또한 그 '타자'를 통해 '나'를 이해하려고 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현장'을 옮긴 나에게 한국사회나 문화에 대해, 그리고 거기서 바라보는 일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한국학'을 배우기 위해 모인 학우들과 국제색이 풍부한 연구의 장은 다양한 깨달음을 내게 주었다. 수업에서 배우는 전문적인 지식과 논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생각하는 데 힘이 되었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우들과의 자유로운 논의는 나와 다른 시각과 사고방식을 알려주었다. 이러한 환경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해 준 동시에 "일본은 어떨까?", "내가 일본인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를 자문하게 만들었으며, 일본, 또는 일본이라는 배경을 가진 나를 상대화하고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은 〇〇이다', '일본은 〇〇이다'는 식으로 차이를 통한 타자 이해나 자기 이해는 자칫하면 차별이나 꼬리표 붙이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학은 차이를 설명하는 것의 어려움, 위태로움을 인식하면서 나와 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사고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을 통해 이 같은 인류학적 사고 훈련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연구를 계속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고 있다.
한국과의 첫 만남, 그리고 ’두개의 코리아’를 다시 생각하다
잊지 못할 말이 있다.
"왜 한반도가 분단되어어야 했는가..."
학부생 시절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만났던 한 한국 청년이 던진 말이다. 이제 그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 말만은 지금도 마음에 새겨져 있다. 광복 80년, 한일수교 60년이 지난 올해, 그것은 또한 남북 분단 80년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지금 이 말에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그림 2] 2024년 8월 한국학대학원 석사 졸업식, 그리고 나의 석사논문
  석사논문에서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당시 한반도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주제로 그 변천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의 문화, 그 중에서도 전통 예술이 '전통'으로 자리매김한 과정과 현재의 한국 전통예술 공연 방식의 일단을 밝히고자 했다. 처음으로 학술적으로 인류학을 배운 상황이었고, 또한 한국어 능력 부족으로 학문을 습득하고 소화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석사과정에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그 덕분에 인류학의 재미와 흥미, 인류학이 사회나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사고방식, 조사·분석 방법의 다양성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석사논문을 쓰면서 연구 내용의 부족함과 한계를 여실히 실감하게 되었고 아직 배울 필요가 있으며, 좀 더 심도 있고 학술적인 조사·연구를 진행하고 싶었기 때문에 다시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을 두드렸다. 아울러 연구의 범위를 남북한으로 넓히고 그를 통해 일본을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박사 과정을 통해 나는 한국에 대해 더 깊이 배워 가며 나의 연구 주제인 “한반도의 전통예술(혹은 민족예술)을 실천하는 재일코리안 예술가”를 통해 해방 후 한반도 전통예술의 변천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그것은 또한 재일코리안이란 "타자"의 시선을 통해 남북한,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자칫하면 역사적 경위나 정치 상황에 따라 경직되기 쉬운 국가 간의 관계와는 달리, 문화를 통한, 그리고 사람들을 통한 또 다른 관계에 대한 시각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또한 '왜 한반도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으면서 연구에 노력해 나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