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칼럼

애민군주 영조, 드디어 실력으로 장원을 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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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수석연구원

   나는 못 배웠어도 자식만큼은 잘 가르치겠다는 게 우리 부모 세대의 정서였다. ‘흙수저’가 출세할 길은 공부가 유일했다. 한국이 산업화 시기에 자원과 자본의 결핍을 극복한 힘은 각별한 교육열이다. 우리의 남다른 교육열은 조선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백운동서원으로 유명한 신재 주세붕은 조카가 학업을 등한시하자 따끔한 편지를 썼다.


“네가 공부를 게을리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내 마음이 오물을 삼킨 듯하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니 도대체 무슨 물건이 되려 하느냐! 내 말을 들으면 사람이요,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짐승이다."


   공부에 소홀한 후손을 호되게 꾸짖는 것은 저명한 옛 선현도 마찬가지였다. 옛사람이 과거 공부에 목맨 까닭은 벼슬을 향한 첫 번째 관문이 과거이고 가문의 부침이 과거 합격자의 지속적 배출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과방(科榜: 합격자 명단)이 도착하면 죽은 부모의 관이 석 자나 들썩인다”는 속담까지 나왔을까.


   과거에는 문과·무과·잡과 및 생원·진사시가 있었다. 그중 문과와 무과를 대과라 하고 생원·진사시를 소과, 혹은 사마시라 한다. 소과에 한정하여 살펴보면, 생원시는 유가 경전에 관한 논술을 출제했고 진사시는 글짓기 능력을 평가했다. 1차 시험인 초시는 도(道) 단위로 관할 고을에서 돌아가며 열렸는데 생원 초시와 진사 초시 각기 700명을 뽑았다. 한양에서 열린 복시, 즉 2차 시험에서는 생원과 진사 100명씩을 최종 선발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율곡 선생은 한 해에 생원시, 진사시, 문과 합격증을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특히 생원시 초시와 복시, 문과 초시의 초장·중장·종장, 복시의 초장·중장·종장, 마지막 전시까지 수석을 놓치지 않아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 일컬어졌다. 그야말로 공부의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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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시험을 치른 유생은 궐문이나 동대문, 남대문, 시소(試所) 출입문 등에 게시된 합격자 명단을 통해 참방 사실을 확인하거나 반주인(泮主人), 방노(房奴), 지인 등을 통해 합격 여부를 통지받았다. 이것이 출방(出榜)이다. 출방 후 10여 일이 지나면 합격자는 대궐에서 열리는 방방(放榜)에 참석하여 합격증을 받았다. 방방 이튿날 다시 입궐하여 사은숙배를 올리고 그 다음날 문묘에서 공자 신위에 참배했다. ‘삼일유가’란 방방일부터 알성일까지 사흘간 한양에서 이뤄진 합격자 퍼레이드다. 합격증을 앞세우고 풍악 속에서 가두 행진하는 유가는 합격자와 부모에게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숙종은 “인간 세상의 영광 중에 과거 급제가 으뜸이고 삼일유가도 은택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다”라 했고, 영조도 “대개 선비는 평생 힘써 공부하여 단지 사흘 동안 부모를 영화롭게 한다”고 했다. 삼일유가야말로 ‘찐’ 효도의 실천인 셈이다.


   합격 동기생 200명은 서로를 동년(同年)이라 부르며 평생에 걸쳐 방회(榜會)라는 동년 모임을 가졌다. 생원과 진사 장원은 동년들로부터 유별난 대접을 받았다. 출방 직후 동년 전체가 장원 집에 가서 명함을 올리며 예를 표했고, 만날 때 감히 읍하지 못하고 절을 했고, 나란히 걷거나 앉지도 못했고, 말 타고 가다가 장원을 보면 말에서 내려야 했고, 이름 대신 ‘장원’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사은 시 생원 장원 집에 모여 장원을 모시고 입궐했고, 알성 시 진사 장원 집에 모여 장원을 모시고 문묘로 향했다.


   이 밖에 장원을 포함한 1등 5명에게는 방중색장(榜中色掌) 한 명씩을 뽑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따라서 첫 방회가 열리면 총 10명의 방중색장이 선발되었는데 대개 명가의 자제가 뽑히기 마련이었다. 방중색장은 방회의 리더이자 동년의 인적 네트워크를 대표하는 직임으로서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 합격한 ‘양시’(兩試), 형제가 함께 합격한 ‘연벽’(聯璧)보다 영예롭게 여겨졌고 그 명단이 합격자 명부에 따로 기재되었다. 이들이 여느 동년에 비해 출세가 빨랐던 것은 당연지사다.


   지천 최명길의 행적을 적은 글에 “우리나라 풍속은 생원과 진사 장원을 극선하므로 으레 합격자 발표일에 피봉을 뜯어보니 문벌이 좋고 명망이 있는 선비가 아니면 장원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피봉이란 응시자 인적사항이 적힌 답안지 우측 부분으로, 공정성을 담보하고자 해당 부분을 둘둘 말아서 풀로 붙였다. 그럼에도 최고의 ‘금수저’를 가려 장원에 앉히기 위해 출방 이전에 전체 합격자 답안지의 피봉을 일일이 확인한 것이다. 온갖 부정이 끼어들 소지가 다분하다. 아니, 피봉을 엿보는 행위 자체가 부정행위다. 이러한 부정행위를 공공연히 자행한 이유는 집안이 좋은 인물을 장원으로 뽑기 위해서다. ‘금수저’의 대물림이다.


   문벌 중시와 피봉 개탁의 부조리한 풍조는 영조 연간에도 여전했다. 1747년(영조 23) 2월, 식년 사마시의 합격 순위를 매길 때 이러한 정황을 처음 알게 된 영조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강력한 개혁의 의지를 피력했다.


"문과는 생·진시보다 중요한데도 오직 등급의 고하로 성적을 매길 뿐 장원을 따로 뽑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유독 생·진시에 이처럼 잘못된 규례가 있거니와, 심지어 높은 성적을 받은 자를 버리고 시권 200장을 다 뜯어본 뒤 반드시 경화벌열을 장원으로 뽑으니 불공정함이 막심하다. 국가의 시험은 사체가 막중하거늘 어찌 출방 전에 피봉을 뜯어본단 말인가! 또한 생원 3위도 1등에 속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시골의 힘없는 인물로 가려 뽑으니 도대체 무슨 이치인가! 내가 이제부터 이러한 병폐를 완전히 뜯어고칠 것이다. 이에 생원 장원과 생원 3위를 이미 바꾸었으니 시관들은 내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랜 전통과 관습이라는 미명하에 피봉을 엿보아 문벌로 장원을 뽑는 관행을 영조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에 생·진시도 문별이 아닌, 실력으로 성적을 매기게 하면서 피봉을 미리 뜯어볼 경우는 과장에 관한 형률로 처벌하겠다고 선포함으로써 개혁을 전격 단행했다. 그리고 출신이 미천한 자를 생원 3위, 진사 6위에 배정하는 이른바 ‘생삼진륙’의 악습에 철퇴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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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는 “생삼진륙은 반드시 촌사람이나 중인, 서얼로 채운다. 서울 사람이 천하게 여기는 것을 촌사람에게 주니 너무 가련하다”고 말하더니 탁월한 답안에도 불구하고 개성 출신이라는 이유로 ‘생삼’에 앉혀진 허증(許增)을 일약 장원으로 발탁했고,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장원에 선발된 심발(沈鏺)을 ‘생삼’으로 끌어내렸다. 고시관들이 ‘국조 300년의 아름다운 고사’ 운운하며 끝까지 반대했으나 영조는 단호했다. 모든 고시관을 파직시키며 끝까지 밀어붙였다. 실력과 공정 이외의 다른 잣대는 용납하지 않았다. 마침내 문벌이 곧 실력이던 소과 장원 선발의 고질병과 사회적 약자를 생삼진륙에 앉히던 오랜 악습이 사라졌다. 장원이 이끌던 방회도 자연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방중색장과 여러 방임도 더 이상 뽑지 않았다.


   입시 전형, 인사 전형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전형은 사람을 가려 뽑는 것이다. ‘전형’(銓衡)이란 한자어는 본래 저울을 가리킨다. 적임자 선발을 저울질에 비유한 것이다. 무게를 달 때 눈금과 저울추가 정확치 않으면 저울은 무용지물이다. 적어도 탕평군주 영조에게는 공정이 눈금이었고 실력이 저울추였다. 영조는 강력한 왕권을 기저로 다양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 가운데 가난한 백성, 시골 유생, 서얼, 중인, 노비, 죄인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정책들이 유난히 눈에 띈다. 기득권의 암묵적 담합에 기인한 만성적 병폐를 좌시하지 않았고 음지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입시난과 취업난이 유례없이 심각한 시대다. 사회적 양극화는 도무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와중에 각종 입시 비리와 특혜 채용 의혹이 허구한 날 도마에 오른다. 돈도 실력이라는 어느 ‘금수저’의 말 한마디가 일파만파 퍼지는 것은 대중의 공분과 좌절의 반영이 아닐까 싶다. 요즘 들어 애민군주 영조의 일갈이 부쩍 가슴에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