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캠퍼스

나의 길을 묻다: 연주자에서 연구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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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로
한국학대학원 문화예술학부
음악학전공 박사과정

방황하는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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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태평소 소리를 들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소리를 좇다 보니 어느새 국악을 전공하고 있었다. 나는 피리와 태평소에 더해 생황까지 모두 아우르는 연주자로 성장해 가는 중이었다. 국악계를 이끌어갈 젊은 루키로 FM국악방송에 출연하기도 하고, 미디어아트와 협업하여 유수의 갤러리에서 자작곡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중국 상해음악원 주최의 제1회 국제생황예술제에서 한국대표로 연주하기도 하는 등 크고 작은 연주들로 학부·석사 시절을 바쁘게 보냈다.


  나는 나의 연주·창작활동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고, 그것은 내가 우리 음악을 무척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내 안의 굳건한 기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건강 문제였다. 왼손 엄지손가락의 통증과 떨림으로 연주하는 것이 너무도 벅찼고, 턱관절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특히 손가락은 여러 병원을 전전했으나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지도, 치료가 효과를 보지도 못했다. 통증이 심해질수록, 균열도 커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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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좌) 천상의 소리를 표현하는 악기 '생황'을 연주하는 장면   (우) 2014년 학부 졸업연주회(태평소 시나위), 이화여자대학교 국악연주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이러한 시련을 더 큰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 일어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이 부족해서였을까? 우리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전통음악의 전승자이며 계승자라는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살았기 때문이었나? 이 같은 물음이 내 안에서 계속됐다.


연주자에서 연구자로


  원래부터도 공부하는 연주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연주를 잘하기 위해서, 진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우리 음악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이론 수업이건 실기 수업이건 늘 책과 악보를 끼고 살았다. 거기에 공연도 열심히 다녔다. 학부시절 어떤 해에는 국악 공연을 주 4~7회씩 쉬지 않고, 즉 거의 매일 보러 다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더 알고 싶었다. 내가 하는 음악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다. 궁금한 것이 많았다.
  궁금한 것이 많다 보니 단행본이나 논문을 뒤적거리는 일이 잦았고,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 음악의 분석방법 “음군”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분석법에 감명을 받아 한 편의 학술적 비평문을 썼는데, 이 글이 감사하게도 국악학술상 평론분야에서 수상을 하게 되었다. 학문적으로 우리 음악을 바라보는 일에서 보람과 성취를 느끼게 된 계기 중 하나이다.


  이런 과정에서 연주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를 위한 공부, 글을 쓰기 위한 공부에 대한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석사과정 중에 존경하는 은사님을 만나고부터는 궁중음악과 관찬악보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궁중음악인 낙양춘(洛陽春)이 남아있는 고악보(古樂譜)를 모두 검토하여 석사학위논문을 썼다. 그 후, 내가 선택한 길은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으로의 진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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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대악후보』 보허자, 『대악후보』 표지(국립국악원 소장)


더 넓은 세상을 만나다


  한국학대학원이라고 하면 한국학에 특화된 곳이라 그 시야와 시선이 제한될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그러한 편견을 와장창 깨부수는 새로운 세계이다. 입학 후 3년이 지나 수료를 앞둔 지금 나는 진심으로 다른 어떤 학교들보다 이곳에 진학한 것을 잘한 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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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곳에서 가장 크게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다. 한국학대학원의 사람들. 다양한 국적과 전공을 가진 이들을 통해 내 학문과 내 세상이 넓고 깊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국내와 해외에서의 학술답사는 처음에는 단지 학교의 지원을 받아 놀고 쉴 수 있는 기회로 여겼지만, 한 번 두 번 거듭되는 답사에 참여하다 보니 그것이 학업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전공 수업을 청강할 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강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오는 이점을 잘 알지 못했지만, 이것이야말로 이곳의 강점인 것 같다. 비록 타 전공의 수업을 온전히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나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고, 학문의 도구로 쓸 수 있는 연장을 새로 장착할 수 있었다.


  전공인 음악학에서도 한국학대학원은 매력이 넘치는 곳인데, 타 대학원에는 전공 교수님이 없거나 한 분씩이지만, 이곳에서는 두 분의 교수님이 계시고 그만큼 다양한 전공수업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같은 전공의 동학들이 많은데, 타 대학원에는 대부분 실기 전공자가 많고 음악학 전공자가 드물지만, 이곳은 양적으로 많은 전공자들이 서로 다른 배경과 관심분야를 가지고 있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상당하다. 나는 이곳에서의 3년을 학업에만 열중했지만 학업 이상의 것을 얻은 시간이었다.


앞으로 가야할 길


  나를 지탱하고 있던 기둥의 균열을 메워준 것은 공부였고 연구였다. 무언가를 굳게 결심하고 다짐하여 진로를 다시 선택했다기보다는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고 있었다. 공부를 지속하며 느낀 것은, 내가 지금 연구하고자 하는 분야는 비록 지금은 다른 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나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점이다.


  지금 내 앞에는 고악보와 음악분석이라는 두 가지 단어가 놓여 있다. 이 두 단어에 집중하는 연구자로의 성장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음악이 학문의 대상이 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현재 전승되고 있는 악곡들과 고악보에 잠들어 있는 악곡들에 대한 연구가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연주자로서의 삶이 그러했듯 연구자로서의 삶도 여전히 사랑과 애정보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이 더 클지도 모른다. 때문에 언제든 위기는 다시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위기가 오고 균열이 생기더라도 극복하고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가 내 안에 있음을 이제는 안다. 균열을 메우는 작업을 통해 더 크고 튼튼한 기둥을 만들어 가는 것이 나의 길이다.


요즘 나의 일상


  요즘 나의 일상은 연구와 연주 두 가지가 거의 전부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8~9할은 논문을 준비하거나 연구보조원 일을 하고, 1~2할은 생황을 연습한다. 피리와 태평소는 힘들지만, 생황은 손에 무리가 덜 가기 때문에 비교적 연주가 가능하다. 그래서 묵혀두었던 자작곡의 악보를 꺼내 다듬고, 새로운 곡을 쓰고 있으며, 다른 작곡가들의 곡들도 준비 중이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오비로의 첫 번째 생황독주 음반을 발매할 계획이 있어서다.


  이 계획도 우리 음악 전승자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에서 나왔다. 생황이라는 악기는 팔음(八音) 중 포부(匏部)에 속하는 유일한 악기로 그 연원은 삼국시대로까지 올라간다. 또한 생황은 우리악기 중 유일한 화성악기이기도 하다. 현재 많은 개량 생황들이 중국에서 수입되고 있으며 그 쓰임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 생황들을 본래 우리 악기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안타깝게도 전승된 유일한 생황은 17관으로 된 생황 하나이다. 그런데 이 생황은 개량 생황들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은 지 오래이고, 오직 정악(正樂) 중 일부 곡들을 연주하는 데에만 쓰이고 있다. 누구도 17관 생황으로 새롭게 곡을 만들어 연주하지 않는다. 즉 17관 생황은 멸절의 위기에 놓여있다. 나는 우리 악기인 17관 생황에 숨을 불어넣고 싶어 직접 곡을 쓰기도 하고 다른 작곡가들에게 곡을 의뢰하기도 하며 음반 발매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 악기가 죽어서는 안 된다.


  비록 음반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지만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연주자로서의 길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연구자로서도 연주자로서도 일의 시작은 책임감과 사명감이었다. 그러나 그런 초심을 유지하고 견뎌내고 이겨내는 힘은 우리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