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복합 위기 시대, 새로운 한국학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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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식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정책실장
한국학대학원 사회학전공 교수

복합 위기의 시대


   오늘날 한국 사회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 위기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파편적으로 존재했던 문제들이 중첩적으로 얽히면서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저성장 경제 상황에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가운데 저출생 고령화, 디지털화, 기후 위기 같은 상황을 사회적 기본값으로 인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한국 사회는 새로운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짧은 시간에 급속한 변화를 경험해 왔다. 탈식민과 냉전, 신자유주의, 디지털과 모바일 인터넷 사회로 세계가 변화하는 가운데 한국은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로 이어지는 역동적 변화 과정을 창출하며 대응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고유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역량을 축적해 냈다. 우선 한국은 산업화를 통해 ‘한강의 기적’으로 지칭되는 놀라운 경제발전을 성취해 냈다.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은 수많은 개발도상국에 주요 참고 사례가 되고 있다. 다음으로 한국은 냉전이라는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분단국가라는 물리적, 국제정치적으로 불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의 노력을 통해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민주화를 이뤄낸 바 있다. 또한 이상과 같은 압축적 발전을 경험하면서 형성된 고유의 역동적 시민사회, 민간 역량이 문화적으로 표출되면서 노벨문학상과 세계 유수의 영화제, 음악상을 휩쓰는 한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한편, 급속한 변화에 대응하여 압축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사회적 문제가 노정되기도 했다. 서구 선진국가를 신속히 따라잡으려는 노력의 와중에 재벌로 지칭되는 대기업 집단이 형성되어 경제를 주도했고, 그 과정에서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과 사회적 불평등 심화라는 문제가 발생하게 됐다. 또한 압축적 근대화(compressed modernisation)가 진행되면서, 전통적 가족제도와 공동체적 질서가 약화되고 과도한 개인주의와 경쟁 압력이 일상의 일부로 자리잡으면서 높은 자살률과 우울증, 심각한 저출생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한국이 성취한 발전과 그로 인한 그늘이라 할 수 있는 문제점들이 중층적으로 얽힌 가운데, 오늘날 한국 사회는 새로운 위기 상황과 마주하게 됐다. 실제로 저출생 고령화는 한국의 고유한 성별분업 관행,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면서 구조화된 사회 불평등과 삶의 불안정성, 승자독식의 경쟁 문화 등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그 결과 한국이 자랑해 온 민주주의의 근간에 도전하는 정치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반도체와 자동차, 가전 등의 제조업 분야의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더해 디지털화, 모바일 기술, AI의 급격한 확산이 가져온 사회·경제·정치·문화적 변화의 속도, 일상의 감각과 관습적 실천을 근본적으로 흩트리는 기후 위기와 같은 시대적 도전은 그간 선진국 따라잡기를 통해 형성해 온 기존 한국 사회의 성장일변도 관행을 발본적으로 성찰하게끔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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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국학의 필요성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복합 위기 상황에서 이제 한국 사회를 냉철하게 이해하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새로운 한국학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지금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 연구는 주로 한국 전통 연구에 치중해 왔다. 가령 장서각 문서를 중심으로 고문서 발굴 및 번역 사업, 현대 이전 전통사회의 가치를 발굴하는 연구들이 주로 수행된 바 있다. 주요 연구 분야 또한 고전적 영역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그에 비해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국면을 거치면서 형성, 전개되어 온 현대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특성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이론화하는 사회과학적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진한 상태이다. 따라서 그간 부족했던 현대 한국에 대한, 학제 간 융합적 분석을 토대로 한 연구를 통해 한국학의 폭과 깊이를 좀 더 넓고 풍부하게 확장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처한 복합 위기를 극복하는 한국학을 정립하는 작업은 단순한 과학기술적 방향 제시로는 불가능하며, 사회과학과 인문과학, 나아가 디지털학을 융합하는 새로운 접근법이 절실히 요구될 수밖에 없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를 역동적으로 거쳐 온 현대 한국에 대한 융합적 연구는 한국적 특수성에 기초한 미래 전망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미래사회로의 이행은 현재의 사회 특성으로부터 상당 부분 경로의존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비전과 도전은 현대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고유성을 기반으로 도출되고 설계되어야 한다. 디지털화와 기후위기의 시대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전망하고 모색하는 작업은 그간 한국이 경험한 역동적 변화의 과정에서 한국사회가 축적하며 형성해 온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특징을 이론화하고 이해하는 것을 바탕으로 구성될 필요가 있다.


미래 전환을 위한 한국학의 과제

   한국학을 선도해 온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역동적 변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온 현대 한국 사회의 고유한 속성을 규명하고 이를 이론화하여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특성과 발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장기 연구를 기획하고 있다. 이는 한국 고유의 경험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오늘날 한국이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이론적 틀과 전략을 마련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현대 한국 사회의 경험을 크게 경제발전, 민주주의, 사회문화의 세 측면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경제발전의 측면을 보면, 한국은 이른바 선진국 따라잡기(catch-up)를 목표로 급속한 산업화를 전개해 왔다. 산업화는 강력한 발전국가의 지원 아래 재벌 대기업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재벌 대기업 주도의 성장은 재벌 총수의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거대한 자원을 신속하게 투자하는 기민성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위험의 사회화와 대기업의 나홀로 성장, 재벌의 경제력 집중, 사회적 양극화와 불평등의 심화라는 고유한 문제점을 노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 선진국 따라잡기를 넘어서는 탈추격(post catch-up)의 과제가 제기되어 경제와 산업, 노동 전반의 새로운 전환의 기회와 도전으로 작용하고 있다.


   둘째,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정부가 급속한 경제발전을 주도해 왔다. 그 과정에서 억압되어 온 시민사회는 아래로부터의 자기희생적 헌신과 운동을 통해 권위주의의 유산을 극복하는 민주화의 성과를 만들어 냈다. 한국의 민주화는 민주주의의 공고화, 그리고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에 있어서 일정한 성취를 거두었다. 그런데 21세기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전개, 정보화와 디지털화의 진행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적 양극화와 혐오의 정치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다문화와 초국가적 이주의 증가는 기존 한국 사회가 생산해 온 가치와 기준을 상대화시키면서 차별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와 국가주의적 사고를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는 디지털화와 기후위기 시대 민주주의의 미래에 새로운 도전과 근본적 전환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은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역량 확대에 집중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성장한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사고와 문화적 실천이 누적된 결과, 한국의 대중문화는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이른바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편으로, 근대적 생활양식이 보편화되고 주체로서의 개인이 등장하면서 한국사회에서 개인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가족과 인구 변동, 저출산 고령화, 높은 자살률과 우울증, 과도한 경쟁의 폐해 등 여러 문제점도 제기되고 있다. 대중문화 역량의 구축과 확산을 경험하며 자란 새로운 세대는 개인이 아닌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엮인 개인‘들’이 증폭시킬 수 있는 역량을 계발하고 있다. 네트워크화된 개인은 기성 사회, 정치, 문화산업 권력과 기존과 다른 방식의 협상을 쟁취하기도 하고, 그를 유희의 방식으로 재구성해 내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역량은 한류라는 산업의 근간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 영역을 새롭게 만들 가능성도 품고 있다.


   편의상 이렇게 세 가지 주제 영역으로 구분해서 설명했지만, 각각의 측면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긴밀히 연결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한국사회를 규정해 왔다. 발전국가 주도의 산업화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유산을 낳고 이것을 넘어서기 위한 민주화의 과제를 제기했다. 또한 민주화와 사회운동은 사회적 자유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인식을 제고했고, 이에 기반해 새로운 세대와 문화 주체가 등장했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세계적 경쟁이 심화됨과 동시에 한류로 대표되는 한국적 유산의 확산을 가져오기도 했다. 한편, 오늘날 나타나는 복합 위기의 양상 또한 각각의 영역이 갖는 특징과 문제들이 중첩적으로 얽히면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복합 위기 시대의 새로운 한국학은 이상의 3개 영역 간의 긴밀한 연계와 상호결합에 기초한 학제 간 융합연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