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칼럼
하나의 표류 사건에서 탄생한 서로 다른 표해록
    -양지회(梁知會)의 『표해록(漂海錄)』과 최두찬(崔斗燦)의 『승사록(乘槎錄)』-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해외여행은 그리 어려운 경험이 아니지만 과거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연행’과 ‘통신사’라는 공식적인 외교 사행의 업무가 아니면 함부로 국경을 넘을 수 없었고, 불법으로 월경(越境)한 자들은 중죄로 처벌되었다. 그런데, 공식적이지 않으면서 법으로도 처벌받지 않는 해외여행이 하나 있었다. 바로 바다에서 조난을 당해 중국이나 일본에 표착하였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경우가 그러하다.
   과거에는 지금처럼 해양 날씨를 예측할 수 있는 과학적 시스템이 없었다. 더구나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바다에서의 표류 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표류한 자들은 배의 좌초와 침몰 등으로 대부분 죽음에 이르렀지만, 구사일생으로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 표착하여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살아 돌아온 이도 있었다. 표류민이라 불렸던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이 겪은 표류 사건에서의 고난과 자신들의 기구한 생환 과정을 직접 기록해 조정에 보고하거나 후세에 전하였다. 또 본인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표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가 표류 사건의 시말을 대신 기록하여 실록이나 문집, 야담집 등에 수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칭하여 ‘표해록(漂海錄)’이라 한다.
   장서각에는 3종의 표해록이 소장되어 있는데, 모두 표류를 당한 이가 직접 기록한 것이다. 바로 1488년(성종 19)의 표류 사건에 대한 보고서인 최부(崔溥)의 『표해록』, 1818년(순조 18)의 표류 사건을 기록한 최두찬(崔斗燦)의 『승사록』과 양지회(梁知會)의 『표해록』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최부와 최두찬의 작품은 조선시대부터 이미 유명하여 관련 연구가 풍부하고 번역본도 출간된 실정이다. 반면 최근 장서각에서 발굴된 양지회의 『표해록』은 그간 조선시대 표해록 연구와 목록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희소 자료로서 현재 장서각과 인천국립해양박물관에서만 소장이 확인되고 있다. 게다가 양지회의 『표해록』에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기존 최두찬의 기록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진 1818년 표류 사건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 내용 또한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지회는 1818년 최두찬이 표류했던 배에 동승한 나주 향리였다. 1818년 4월 제주에서 출발해 나주로 향하던 배가 돌풍에 의해 표류를 겪다가 중국 어선에 구조되어 절강성 정해현에 인도된 후 항주-산동-북경 등을 거쳐 그해 9월 조선으로 돌아온 것이 표류의 전말이었다. 당시 양지회는 표류민 중 최연장자로서 표류 고난의 극복과 무사 생환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자연히 그의 『표해록』에도 일행이 당시 표류 과정에서 겪었던 생사의 문제와 표류민 사이의 갈등, 귀환 과정에서의 고난과 각종 사건들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이뿐 아니라 양지회는 그들이 표착한 중국 절강성과 항주 일대의 이국적 풍경과 그곳의 풍속과 문물에 대한 정보도 함께 기록함으로써, 많은 조선인들에게 미지의 공간이었던 중국 강남 지역에 대한 정보 또한 상세히 제공하였다.

“앞서 물항아리가 잘린 돛대에 이미 깨져버려 점차 갈증을 견디기 어려웠다. 바닷물은 너무 짜서 마시면 잠시 목마름이 해소된 듯했지만 혹여 마시는 것에 빠져들면 더욱 갈증에 시달리게 되니 더욱 고통스러웠다. 간혹 돛의 이슬을 핥기도 했지만 (돛은) 이슬에 젖은 즉시 말라버렸다. 비록 몇 되의 쌀이 있었어도 죽을 쑬 겨를이 없었기에 이에 굶주림과 목마름이 모두 극에 달하여 다시 살고픈 마음이 없어졌다.”
“그 풍속에 남자는 주변머리를 삭발하고 위에 상투를 틀어 월자(月子)를 엮어서 허리 아래까지 드리웠는데, 우리나라 대오군(隊伍軍)의 복식과 비슷했다. 트인 소매와 긴 옷깃이 상의에 달려 있으니 모두 푸른 비단과 검은 명주였다. 두건은 더욱 특이하여 모양이 감투 같았으며, 어떤 것은 황색이고 어떤 것은 흑색이었는데, 모두 비단이었고 그물처럼 엮어서 장식하였다.” -이상 양지회의 『표해록』-
   이에 비해 최두찬의 『승사록』은 표류 사건의 고난과 여정을 자세히 기술하기보다는 중국 강남 지방에서 만난 문사들과의 교유 양상과 주고받은 시를 중점적으로 기록하였고, 이색적인 문물과 제도 등을 부연하기도 했다.
   표류에 대한 인식에서도 양지회는 표류를 고통스럽고 중대한 사건으로 인식하여 사건 해결과 무사 귀환을 위해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발휘한 반면, 최두찬은 불안감이나 절망감보다는 여유롭고 낙관적인 자세로 표류 상황을 인식하며 표류 자체를 운명으로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날 새벽까지 잇달아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대로 표류하다 멈추다 하였다. 미친 듯한 파도와 성난 물결에 사방을 돌아보아도 끝이 없었다. 나는 ‘莫非命(운명 아닌 것이 없다)’는 석자로 김이진 군을 위로하고 힘쓰도록 하였다.”
“바람이 조금 누그러지자 바닷빛이 맑고 깨끗하였다. 아침 해가 바닷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해가 떠오르려고만 하고 아직 떠오르지 않았을 즈음에는 붉은 파도와 흰 물결이 만 리를 밝게 비추어 빛났으니 근심 속의 즐거움이었다. 이에 <적벽사(赤壁詞)> 한 편을 읊고, 이어서 시 한 수를 지었다.” -이상 최두찬의 『승사록』 -
   저자들의 이러한 인식 차이에 따라 최두찬의 『승사록』은 표류를 통한 새로운 경험과 만남을 시로 노래한 서정적 표류기로서, 그리고 양지회의 『표해록』은 사건과 여정을 중심으로 한 서사성이 돋보이는 표류기로서 각기 나름의 특색을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두 자료는 하나의 표류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글쓰기와 인식을 보이고 있지만, 두 기록의 상호 비교를 통해 우리는 1818년 표류 사건의 전모와 숨은 이야기, 당시 강남 지역의 일면을 고루 확인할 수 있다. 현전하는 표해록 가운데 동일한 표류 사건에서 이종의 표해록이 작성된 사례가 없진 않지만, 두 작품처럼 기록의 차이가 크고 상호보완적인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두 기록은 남다른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