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캠퍼스
지역사회학자의 꿈, ‘Hope against hope!’
한국학대학원에서 네 번째 계절, 난 무엇하는 사람인가
  글을 읽고 쓰며 벌써 네 번째 계절을 맞는다. 꿈처럼 아득하지만, 진한 현실의 색채에 눈이 머는 이곳, 한국학대학원에서의 여정은 항상 나를 설레게 한다. 많은 사람과의 만남과 다양한 사상과의 교류를 통해 내 사회학적 고민이 무르익을 때, 경험하는 희열이 예비 연구자인 나를 전율케 하기 때문이다. 수시로 교정을 산책하며 ‘자문(自問)’한다. ‘난 무엇하는 사람인가’라고 말이다. 아직 선명하게 ‘자답(自答)’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 글을 쓰며 회고하는 지난 몇 해가 자답의 단서를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다.

문학 소년이 마주한 우연과 모순

  학부 시절, 문학은 세상을 읽는 또 하나의 창이었다. 특히 윤흥길과 조세희의 소설을 탐독하며 현대사에서 발현하는 사회모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성실한 소설가가 되어 민중 사랑을 실천하고자 습작과 더불어 사회적 행동을 이어갔다. 이런 문학소년의 낭만은 대학교 1학년 겨울, IMF 외환위기로 인해 변색하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던 참 어둡던 이 시기, 우연히 수강한 ‘사회학’ 교양강의는 한국 사회의 제문제에 심취해 있던 내게 큰 지적 쾌감을 주었다. 우연이 만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국제정치학을 복수전공으로 공부하며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규명해 나갔고 사회과학이야말로 인간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확인했고, 은사와의 조우는 이 같은 내 생각에 확신을 주었다.
  학부 졸업 전 2년간 이어간 은사와의 책 읽기와 토론은 귀중한 사회학적 훈련이었고, 가치 있는 지적 함양의 기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우리 사회에 남긴 유산’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의 사회 변동 과정에 미국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살피는 연구에 생을 걸고 싶었고 은사께선 나를 격려하셨다. 이를 위해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는데, 대학원은 논문을 통해서나 접하던 연구자들과 지적으로 교류하는 학술의 장(場)이자 실천의 공간이었다. 겸손하시면서도 청출어람을 허락지 않으시던 교수들은 지적 자극의 강한 원천이었다.
사회학의 쓸모를 생각하며, 사회학자의 꿈을 꾸다.

  대학원은 함께 공부하는 벗들과 우정을 쌓는 곳이었다. 매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세미나는 비전공자인 나를 사회학적 상상력을 실현할 예비 연구자로 단련시켰다. 그 과정에서 대학원의 각 구성원은 서로의 연구를 돕는 동료이자 벗이었다. 석사과정에 진입하며 수립한 학문지향을 구체화하고 이를 위한 소양을 완비하여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도움과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미관계 155년사’를 품은 어촌 마을, ‘매향리 연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연구가 전개되며 한국전쟁이 우리 사회에 남긴 유산과 더불어 한국의 사회 변동에 미국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분석하는 일은 매력적이었다. 작성한 석사학위 논문은 <매향리에는 매화나무가 없다>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그렇게 문학 소년은 사회학도가 되어 같은 꿈을 키우게 되었다.
다시 한번 우연의 힘을 믿으며 만든 필연의 이유

  석사학위 수여 직후 우연은 더이상 나를 아름다운 곳으로 이끌지 않았다. 결혼과 동시에 경제적 어려움과 가중되었고, 아버지의 선종으로 두 가정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했다. 하루하루 숨이 막혔지만 향후 학업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이때 되뇌던 글귀가 바로 ‘Hope against hope(희망에 반하여 희망하라)’였다. 당장 학업을 계속할 수는 없지만, 언제고 올 우연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강의계획서 열람이 가능한 연세대학교 홈페이지에서 사회학과 강의계획서를 구하여 강의 교재들을 정독했다. 책을 읽은 후에는 K-MOOC나 유튜브 등 매체를 활용하여 내 이해정도를 살폈다.
  매 학기 국내 대학원들이 입학 전형이 발표되면 몇 학교를 선정해 학업계획서 등 입학 서류를 작성했고, 이 중 한 학교에는 전형료를 지급하며 작성한 서류의 질적 완성도를 검증받았다. 물론 매일 일정량의 영어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현실의 무게는 날로 나를 지치게 했지만, 학업에 대한 기대감으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이 정도 어려움은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나에게 내일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아내에게 이 지면을 통해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대에 마친 석사학위를 뒤로하고, 어느새 불혹(不惑)의 중간쯤을 달리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문제의식을 소재로 작문연습을 시작했다. 긴 글보다는 짧고 명료하게 작성하는 습작에 주력했다. 한편 이 시기엔 한국전쟁과 한미관계 관련 신간들이 연이어 출간되었으므로 이들을 통독하며 학교를 떠나 연약해진 학문적 문제의식을 한층 정교하게 다듬었다. 이 무렵이 되자 14년이 넘도록 나를 옥죄던 경제적 어려움도 해소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생으로서 한국전쟁이 남긴 유산을 연구하게 되었다. 지난 17년을 한결같이 희망에 반하게 희망한 결과였다.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곳에서 만나는 새 학업의 희열
  이곳에서의 한해살이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입학 면접이었다. 모든 전공의 교수님이 참여하는 면접 방식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기절할 정도로 긴장한 내 앞에 위풍당당한 열 명의 면접위원의 존재는 실낱만큼 남은 자신감을 박살 내기에 충분했다. 국무위원 인사청문회 중 윽박지르는 국회의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느새 내 눈은 빠른 속도로 선한 인상의 면접위원을 찾기 시작했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그런 표정의 면접위원은 한 명도 없었다고 기억한다. 하늘이 17년 만에 허락한 것은 학업 지속의 희열이 아니라 숨이 막히는 고문의 지속이었다. 그때 한 면접위원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합격 후에 알았다. 그가 바로 사회학과 교수셨다. 그분이 보기에도 내가 참 불안해 보였나 보다.
  그러나 요란했던 이 면접은 오히려 내가 입학 서류를 작성하며 품던 다수의 의구심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면접위원은 각 전공의 관점으로 내 석사학위 논문과 각종 서류를 꼼꼼히 살펴 주었다. 특히 지역연구에 관심을 두던 내게 인류학과 소속 면접위원은 다량의 질문과 더불어 긴 시간을 할애하여 연구 방법에 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정치학과, 한국사학과에서 오신 면접위원들도 같은 방법으로 합격 여부와 무관하게 나의 지난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향후 연구에서 보완해야 할 사항들을 제안했다. 감사한 일이었다. 이로써 학교를 떠나 이어가던 속앓이가 대부분 해소되었고, 향후 연구를 구체화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이 내 학업에 어떤 조력을 할 것인지에 확신을 두게 되었다. 그렇게 난 건강한 학문공동체에 입학할 수 있었다. 우연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사시사철 조화로운 외침이 있는 활홀한 낯설음의 전당

  입학 후 일 년이 되어간다. 아직도 때때로 어색한 우리 대학원의 낯섦이 나는 참 좋다. 조금 더 이 신선한 낯섦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모든 이가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 낯선 만큼 우리 학교가 좋아진다. 그때마다 김지하의 시, ‘새봄’의 우아한 시구를 떠올린다.
  학부생이 없어서인지 학교는 항상 고요하다. 집회는커녕 축제한다며 특설무대에서 가수가 노래하는 일도 없다. 처음에는 내가 학교에 온 것인지, 산 중턱 수도원에 온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대침묵(Altum Silentium)’ 속에서 기도와 노동을 거듭하는 봉쇄수도원의 수사가 된 듯한 이 ‘허적(虛寂)’의 어색함.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알게 된다. 곧 바람과 나무와 숲이 만들어 내는 맑은 노래와 산새와 고양이와 곤충들이 조화롭게 부르는 자연의 외침을 경청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이크와 스피커로 대중을 이끄는 소리는 없지만, 작고 사소한 제자의 질문에도 깊이 집중하며, 함께 고민하고 공부하는 많은 교수의 열정이 창출하는 소리에 나는 늘 감동한다. 지난 네 계절은 청계산의 적막이 아닌 우리 사는 세상의 아름다운 합창을 감상하는, 아니 그것에 동참하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감동이었다.

우리 사는 세상, 나와 너 아닌 우리의 열정으로
  학제 간 장벽 없이 모든 전공 강의의 수강이 가능한 점은 ‘역사적 흐름’과 ‘지역적 맥락’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내겐 큰 매력이었다. 따라서 사회학 전공들 외에도 정치학 전공을 수강했고, 다음 학기에는 지역연구를 위한 인류학과 및 인문지리학 전공 강의를 수강할 예정이다. 최근 ‘융합’의 가치가 유행처럼 번지지만, 이 흔한 명명이 실현되는 사례는 흔치 않다. 학과가 아닌 대학원 차원에서 박사과정을 선발하는 방식과 함께 이 같은 학제의 유연함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던 일종의 보수적 색채, 또는 고리타분함을 일소했다.

  다양한 국적의 대학원생이 함께 만드는 기분 좋은 지적 교류의 여정도 낯설었다. 그러나 동일한 국제적 이슈도 국적에 따라 다양한 논의가 오가는 지적 소통의 여정이 신선했다. 특히 지난 한 해 국내에서 발생한 다수의 사회정치적 사건들을 논의하며 한국적 맥락에선 미처 생각지 못할 참신한 의견들이 자유롭게 논의되는 상황은 자주 나를 흥분하게 했다. 이 같은 환경은 나에게 사회학적 관심의 확장과 함께 가치 중립적 긴장감, 그리고 인식론적 유연성을 기르는 훈련소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를 학풍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소통의 문화를 나는 참 좋아한다.
아무도 낸 적 없는 과제, 누구나 해야 하는 과제

  이곳에선 누구나 입학과 동시에 한 가지 과제를 부여받는다. 물론 과제를 낸 사람도, 제출 기간도 없다. 그런데도 교수도 학생도 이를 수행하기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 바로 ‘한국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각자의 답안을 모색하는 일이다. 나는 아직 공부가 짧아 그 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강의와 세미나 중에 교수들도 이에 대한 고민을 종종 드러내곤 한다. 나도 학업에 정진하다 보면 언젠가 엉성하게나마 그 답안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날이 사회학 박사가 되는 날이 아닐까? 박사가 되어도 그 답을 구하기 위해 다시 이곳 도서관을 전전한 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답을 구하는 순간이 나의 학문을 포함한 내 삶의 종착지가 아닐까. 부디 내 기대수명을 꽉 채우기 전에 그날이 오길 소망할 뿐이다. 황홀할 것 같다.
한국의 사회사 연구에 일조하는 것, 그렇게 우연의 힘에 몸을 싣기
  지난 2004년, 석사과정은 대학원 최연소(남학생 중)로 입학했다. 긴 공백을 두고 박사과정을 시작하니 우습게도 지독한 난시와 ‘노안(老眼)’이 나를 괴롭힌다. 그래서 인생은 재미있다. 우연이 때때로 베푸는 기분 좋은 필연이 이제는 즐겁다. 입학 면접 마지막 질문을 기록해 책상에 부착해 두었다. 박사과정을 영위하며 매일 살펴야 할 지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석사과정 시절 배운 것을 모두 기억하시나요’라는 질문이었다. 지난 17년의 학업 공백이 적지 않은 망각을 허용했으리라. 그래서 나는 기억하기 위해 힘을 준다.
  박사과정을 시작하며 한국전쟁이 지역에 남긴 유산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로서 학계에 이바지하고, 학문의 근원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신 은사의 말씀을 명심하며 실천하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다. 문학으로 세상 보기가 시간의 줄을 타고 사회학의 옷을 입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맞는 네 번째 계절이 유난히 맑게 채색된 이유는 여전히 내가 신뢰하는 우연의 힘이 나의 호흡과 심장을 관통하여 오늘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끝으로 귀한 일깨움과 가르침을 주시는 모든 교수님과 벗들께 깊은 존경의 마음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