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칼럼

영조의 조선 역사 바로 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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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정연구원

주린(朱璘)의 가죽을 베개 삼고 살점을 먹고 싶다!


   1771년(영조47년) 발생한 ‘명기집략(明紀緝略) 사건’은 조선 왕실의 선대에 대한 왜곡된 기록이 담긴 청나라 학자 주린의 저서 『명기집략』이 알려지면서 시작되었다. 태생적인 한계와 즉위 과정의 오해 등을 극복하고자 했던 영조는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증명하는 데 누구보다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런 영조에게 명기집략 사건은 자신의 권위는 물론 조선 왕실 전체의 위상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일이었다. 주린의 가죽을 베개 삼고 그 살점을 먹고 싶을 정도로 분노한 영조는 관련 서적들을 대대적으로 수거하여 소각하고, 유입·유통시킨 관련자들을 엄중히 처벌했다. 조사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 서적, 즉 명나라 진건(陳建)의 『황명통기(皇明通紀)』가 발견되자 청에 두 책의 유통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청의 답변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영조에게 뜻밖의 기쁜 소식이 도착했다. 청에서는 해당 서적들이 자국 내에 유통되지 않고 있음을 조선에 알리고, 조선이 이 책들에 대해 자체적으로 처분할 권한을 보장해 주었다. 기대 이상의 외교적 성과를 거둔 영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역사서에서 선대의 오류를 삭제하라.


   영조는 숙종대 이래 진강(進講) 서적이었던 『황명통기』를 모두 소각하는 대신 개수하기로 했다. 『황명통기』에는 태조 이성계가 정적(政敵)인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는 오류 내용의 흔적이 네 글자가 누락된 채 남아 있었고, 선조가 술에 빠져 국방을 소홀히 했다는 내용으로 추정되는 부분 역시 다섯 글자가 삭제된 채로 전해지고 있었다. 이에 영조는 태조의 종계(宗系)와 관련된 왜곡된 내용을 완전히 삭제하는 한편으로, 교역·혼인 등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우호적 관계를 다룬 조일 관계 기사나 전란 발발의 책임을 선조나 조선 측에 전가할 수 있는 주관적 평가 부분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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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황명통기』에서는 조선 선대를 무함(誣陷)하는 내용이 모두 삭제되었고, 『황명통기집요(皇明通紀輯要)』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편찬되었다.


고려시대 18대 목조(穆祖)에서 신라시대 시조(始祖) 이한(李翰)으로.


   ‘명기집략 사건’이 무사히 마무리된 직후 전주이씨 유생과 생원 575명이 상소를 올렸다. 시조인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을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청원하는 내용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 이후 4대조인 목조까지만 추존했는데, 이를 신라시대 이한까지 확장시키려는 의도였다. 문중에서 선대를 규명하는 풍속이 유행하던 세태 속에, 영조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신하들에게 집안의 일에는 앞장서면서 국가의 일은 소홀히 하는 태도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상소가 올라온 지 3일 만에 전주 경기전(慶基殿) 옆에 조경묘(肇慶廟)를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약 2개월 만인 11월 26일에 신주 봉안과 제사까지 일사천리로 마쳤다. 마지막으로 명기집략 사건의 해결과 조경묘의 건립을 기념하는 과거 시험을 열고, 백성들에게는 세금 탕감과 음식 제공 등 실질적이고 가시적인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왕실의 경사를 국가적인 경사로 확대하여 기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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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영조는 ‘명기집략 사건’을 계기로 『황명통기집요』를 개찬하고 조경묘도 건립함으로써, 조선이 유구한 데다 한 치의 오류, 오점도 지니지 않은 역사로 재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영조의 조선 역사 재정립에 대한 더욱 심층적인 내용은 장서각 열린수장고에서 제공하는 유튜브 강의 '황명통기집요(皇明通紀輯要)와 조선 왕실 계통의 재정립' (5월 13일 오전 10시)에서 공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