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생명 박동의 리듬을 느끼다- 음과 양, 그리고 상관적 사유

   생명의 탄생이 남과 여, 음과 양의 결합으로 생긴다는 생각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상식처럼 들린다.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주역(周易)』은 이 상식을, 위의 인용을 포함한 다양한 변주를 통해 노래하고 다시 확장, 확인한다. 천지(天地), 건곤(乾坤), 남녀(男女), 강유(剛柔), 한서(寒暑), 개폐(開閉), 동정(動靜), 도기(道器), 진퇴(進退), 유명(幽明), 대시(大始)/성물(成物)…이 상관적 사유의 저수지로서의 『주역(周易)』은 동아시아 전통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한국 전통에서 환웅과 웅녀, 박혁거세와 알영, 해모수와 유화의 결합의 이야기를 음미해본다. 여러 차이가 있는 <단군신화>, <박혁거세 신화>, <고주몽 신화>의 세부설명에도 불과하고, 공동체 혹은 그 지도자의 탄생은 남과 여의 결합과 성혼이 있어 가능했다는 점에서는 하나같다. 상식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명의 네러티브에서도 이런 생명의 탄생에 남녀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상식이 통할까? 기원전 12세기의 바빌로니아 창세 신화 <에누마 엘리쉬(Enūma Eliš)>에서 세계의 탄생은 남녀의 성혼이 아니라 남성 신 마루둑의 언어 능력으로 가능했다. 그는 땅의 여신 티아맛을 살해하고 그 폭력을 자랑했으며, 말로써 사물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무용(武勇)을 과시하며 동료 남성들 사이에서 인정받는다. 유대-기독교의 창세기에서 남성 신은 그의 말(Logos)로 세계를 탄생시킨다. 창조는 절대자의 이성적 계산과 장인적 기술(craftmanship)로 탄생한 것이다. 그리스의 전쟁의 신 아테나는 어머니 없이 아버지인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다. 플라톤의 우주 창조주 데미우르고스는 우주의 설계자이고, 기독교의 신 야훼는 우주의 형상과 질료를 모두 창조했지만, 어쨌든 이 과정에서 여성은 필요하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들은 남녀의 만남으로 생기지만 구세주는 성령으로 잉태된다. 평범한 여성은 여자가 낳지만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다. 사물들은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지만, 이데아는 이성으로만 인지할 수 있다. 보통의 나라는 인종, 지정학적 위치, 종교전통으로 규정되지만, 미국은 이성으로 탄생했다. (Every other nation you can define by their ethnicity, their geography, their religion, except America. America was born out of an idea.). 미국의 46대 대통령 조 바이든의 서기 2021년 언급이다.
   이러한 서구문명과 동아시아 문명의 대조는 지난 100년 동안 많은 비교철학자, 역사학자, 심리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특히 탕쥔이(唐君毅), 황똥메이(方東美) 앵거스 그래이험(Angus Graham), 조셉 니덤(Joseph Needham), 로저 에임스와 데이빗 홀(Roger Ames and David Hall)은 이 비교문화의 통찰을 잘 보여주었다.
   음양(陰陽)이라는 사유형태가 한대(漢代)에 이르러 보편화되어 모든 사물이 이 범주로 분류됐다는 주장이 있다. 우선 음양이 개념적 '범주'인지 근원적 '메타포'인지는 따지지 않더라도, 기원적 12세기 고대문명에서부터 천명(天命)을 읽는 점복의 기술, 민중의 축제, 캘린더의 발달, 개인적 집단적 습관, 풍습에서 상관적 사유는 역사를 통해 축적됐고 그에 대한 반추를 통해 사상의 성립이 가능했다는 의견에 가깝다. 적어도 마르셀 그라네(Marcel Granet)의 선구적 『시경(詩經)』 연구와 데이빗 키틀리(David Keightley)의 상대(商代) 후기 갑골문 연구는, 고대에 이미 이러한 사고-행동 형태가 만연해 있다는 생각을 지지해 주고 있다. 이렇게 축적된 문명 차이가 만든 독특한 문화는 오늘날 살아 있는 이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철학자들은, 음양이란 상징에서 상관적 사유와 추상적 사유, 과정적 실재관과 실체적 실재관, 몸의 인식론과 감각의 인식론을 연구할 가치를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의 수렴과 확산, 변형과 통합, 이들이 가져올 인간, 사회, 역사와 문명의 현재와 미래의 귀결에 관심이 많다.

   장서각은 조선 왕실 뿐 아니라 주로 사대부 집안에 소장된 다양한 문헌 중 『주역(周易)』과 연관된 다양한 텍스트를 보유하고 있다. 조선 유학을 지배한 주자학은 『周易』을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생명과 탄생(生生) 문화의 한국적 전개를 연구할 중요한 자료들을 찾을 수 있다.
   명대(明代) 호광이 편찬한 것을 조선 세종 때 출판한 『주역전이대전(周易傳義大全)』에는, 정이천의 『이천역전(伊川易傳)』, 주희의 『 주역본의(周易本義)』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 유학자들에게 널리 읽힌 판본으로서, 조선시대 선비들의 주역 이해의 틀을 통해 당시의 지식 사회학을 읽을 수 있다. 주역에 대한 상수, 의리의 관점에서 전개된 조선 유학자들의 다양한 저술, 19세기말 최한기의 새로운 문명의 비전 및 신종교에서 쓰인 계시적 문헌과 결합한 『주역(周易)』, 시(詩)와 예악(禮樂) 텍스트에서 보이는 남녀 짝짓기, 결혼예식의 구성, 월령(月令) 계통의 텍스트들에서 보이는 세시 풍습과 생활습관, 시공간에 대한 인지와 『주역(周易)』의 관계, “왜 동지에 궁궐의 대문을 폐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주역(周易)』을 원용해 논리를 전개한 생원 임영의 시권(試券, 1671)을 비롯, 발굴과 연구를 기다리는 저술과 문서들, 역(易)을 주제로 하거나 그를 근거로 서술된 자료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