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호흡 헤아림으로 마음 속 거울 닦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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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책임연구원

   무던히도 더운 여름이었다.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뜨거운 여름이라는 기사가 툭하면 등장했다. 초당 원자폭탄 5개 폭발에 상응하는 열에너지로 빙하마저 속절없이 녹아내린다고 하니 말 다했다. 기후변화에 관한 거창한 담론은 차치하고 미증유의 폭염 속에서 평소의 일상과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급격한 집중력 저하 탓에 문단 한 토막 작성하는 데 하세월이고 마우스와 한몸이 되어 모니터에 코 박고 온갖 곳을 기웃거리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 어울릴 법한 표현이 『장자(莊子)』에 나오는 ‘좌치(坐馳)’가 아닐까 한다. 앉을 좌, 달릴 치. 몸은 여기 앉아 있지만 정신은 온 사방을 치달린다는 뜻이다. 생각을 한데 모으지 못하면 좌치하기 마련. 일할 때도, 공부할 때도, 심지어 누군가와 대화할 때조차 좌치한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마음만 분주할 뿐 흘려보내는 시간이 태반이다. 이 고약한 버릇을 개선할 묘안이 있긴 하다. 바로 호흡 헤아림이다.


   조선 후기 실학의 거두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박학과 통찰 방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다. 다음은 그가 지은 <수식잠(數息箴)>의 일부다. ‘수식’은 호흡을 세는 것이다.


수식잠

   학문적 스펙트럼이 드넓어 백과전서파로 칭해지는 성호도 마음이 산란해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있었나 보다. 그럴 때면 묵묵히 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은 호흡을 헤아리는 것이다. ‘호흡’의 ‘호’는 날숨이고 ‘흡’은 들숨이다. 오직 날숨과 들숨에 온 정신을 쏟으며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다 보면 어느새 마음 속 눈이 명철해졌다. 모두에서 호흡 헤아림이 마음 보존의 준칙이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자칫 찰나의 잡념에 사로잡히면 여태 헤아리던 숫자를 까맣게 잊어버리면서 명상의 공이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다행인 것은 호흡 헤아림도 여느 행위와 마찬가지로 꾸준히 반복하다 보면 저절로 익숙해진다는 사실이다.


   수식 수련은 본래 불가의 수행법으로 전통 시대 선비들이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 애용하던 방법이다. 동방오현(東方五賢)의 일원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도 첫닭이 울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정좌한 채 호흡을 헤아렸다. 그리고 마음 속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선생[김굉필]께서는 뜻이 맞는 벗과 같이 거처하면서 첫닭이 울면 함께 앉아 호흡을 헤아렸다. 남들은 겨우 밥 한번 지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모두 숫자를 잃어버렸으나, 유독 선생은 그 횟수를 낱낱이 헤아리며 동틀 무렵까지 잃어버리지 않았다(先生相與執友同棲, 鷄初鳴, 共坐數息. 他人纔過一炊皆失, 獨先生歷歷枚校, 向明不失).


   한훤당의 학문적 성취는 타고난 자질과 부단한 독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동쪽 하늘이 밝아 올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호흡에 귀기울이며 그 숫자를 놓치지 않았다니 그의 집중력은 가히 혀를 내두를 만하다. 성호도 그렇고 한훤당도 그렇고 세상의 수많은 지식을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던 것은 그 정신이 명징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게 능사가 아니다. 주자(朱子)가 제자 요진경(廖晉卿)에게 건넨 말처럼 무엇을 읽는 것보다 흩어진 정신을 수렴하는 것이 먼저다. 회사후소(繪事後素)의 흰 비단은 그림 그리기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다.


   처서(處暑)가 지나자 거짓말처럼 더위가 수그러들더니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청량하다. 그간 좌치에 물든 타성을 긍정적 루틴으로 바꿀 호기가 아닐까 싶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짬을 내어 내 호흡을 헤아려보는 건 어떨까. 넉 달 남짓 남은 계묘년을 보다 명징한 정신으로 마무리하는 건 어떨까. 돈 몇 푼을 아낄 게 아니라 한번 지나가면 그만인 매 순간을 명철하게 살아보는 건 어떨까. 날마다 세수만 할 게 아니라 먼지가 뽀얗게 쌓였을지 모를 내 마음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