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숙종의 환국과 지문(誌文)의 정치학

김윤정 사진
김윤정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연구원

   숙종의 즉위식은 아버지 현종의 국상 절차 중 하나였다. 슬픔에 빠진 14세의 숙종은 신하들의 사위(嗣位) 요청을 거듭 물리쳤지만, 결국 현종 승하 후 6일째인 1674년 8월 23일 왕위에 올랐다. 사위 의식을 위해 숙종은 상복을 벗고 길복인 면복(冕服)을 갖추었다. 그러나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고, 신하들도 함께 울부짖는 슬픔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국왕 숙종의 첫 번째 의례이자 임무는 현종의 국상 절차를 완수하는 것이었다.


   9월에 현종의 숭릉(崇陵)을 택지했고, 지문의 찬술을 송시열(宋時烈)에게 맡겼다. 지문은 피장자의 일대기를 돌에 새겨 함께 묻는 것으로, 영원한 기록으로서 상징성을 갖는다. 이에 효종의 영릉지문(英陵之文)과 다수의 묘지명(墓誌銘)을 찬술한 송시열이 적임자로 선정되었다. 그런데 9월 25일 진주 유생 곽세건(郭世楗)이 상소를 올려 예송에서 송시열의 ‘오례(誤禮)’를 지적하고, 송시열을 효종과 현종의 죄인이라고 비판했다. 숙종이 효를 다하기 위해서는 갑인예송에서 보인 현종의 뜻에 따라 서인의 잘못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송시열은 지문 찬술을 사양하고 낙향했고, 명성왕후의 사촌인 척신(戚臣) 김석주(金錫冑)가 숭릉지문을 지었다. 김석주는 논란이 되는 기해·갑인 예송 부분을 현종 중심으로 서술했다. 기해예송에서 대신과 유신들이 국제(國制)인 󰡔경국대전󰡕과 고례(古禮)를 근거로 기년복을 주장했고, 현종은 이를 검토하여 최종 결정을 내렸다. 갑인예송에서도 복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주체는 현종이었다. 현종의 결단에 따라 대공을 기년으로 고치고 예관의 잘못을 처벌했다. 결국 현종이 예경을 친히 고증하여 잘못된 점을 분별하고 국가의 예를 바로 잡은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기해년과 갑인년의 논쟁은 서인과 남인이 격돌하는 예송이 아닌, 왕이 주체로서 잘못을 수정하고 처벌하는 국정행위로 간주되었다. 송시열 등의 구체적인 인명을 거론하지 않고 현종의 결정을 부각시키는 서술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었다. 따라서 남인이 정권을 잡은 기사환국 이후에도 김석주의 숭릉지문은 개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송시열이 지문 찬술을 고사한 이후에도 예송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의는 계속되었다. 척신 김석주와 정국의 변화를 꾀하던 남인들은 명분상 예론을 이용하여 서인을 공격했다. 다음해 1월 결국 송시열은 유배를 떠났고 이후 대부분의 서인들이 축출되면서, 남인과 척신 세력이 집권하는 갑인환국이 완성되었다. 숭릉지문은 갑인환국이 진행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송시열 명성왕후숭릉지문

[그림 1] (좌) 송시열이 지은 명성왕후숭릉지문 (탑본, K2-5257-2)
     (우) 민암이 지은 명성왕후숭릉지문 (필사본, K2-3930)


   1680년(숙종 6) 3월 서인이 집권한 경신환국은 송시열의 귀환으로 이어졌다. 출사를 사양하던 송시열은 1680년 10월 26일 승하한 인경왕후의 익릉지문(翼陵誌文) 찬술을 맡았다. 왕후의 지문은 왕이나 세자가 지은 행장을 토대로 찬술되는데, 여성의 역할을 중심으로 ‘가문의 세계-본인의 일생-자손들의 현황’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인경왕후의 지문에 갑인환국과 남인의 무도함을 끌어넣었다. ‘적신(賊臣)’남인들이 인경왕후를 동요시키기 위해, 친경례(親耕禮)와 친잠례(親蠶禮)를 권하면서 후궁을 들이게 했다고 비판했다. 인경왕후의 덕성으로 인해, 하늘이 바람과 우레로 도움을 주어 친경례를 무산시켰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을 개입시켰다. 또한 남인들이 예론을 청탁하여 서인을 도륙하려 했지만, 인경왕후는 평안하고 돈후하여 위태롭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남인의 무도함을 강조하면서 인경왕후의 덕성을 칭송하는 서술방식은 주객이 전도된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송시열이 찬술한 지문은 그대로 각석되어, 인경왕후의 익릉에 매장되었다.


   1683년(숙종 9)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역시 송시열이 지문을 찬술했다. 첫 문장에서 명성왕후는 주나라 문왕비인 태사(太姒)와 여중요순(女中堯舜)으로 일컬어졌던 송나라 선인고태후(宣仁高太后)와 동일시되었다. 이러한 칭송은 홍수지변(紅袖之變)에서 명성왕후의 정치적 역할로 극대화되었다. 홍수지변은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인 복창군(福昌君)과 복평군(福平君)이 궁궐에 드나들며 궁녀와 사통한 사건으로, 명성왕후의 아버지인 김우명(金佑明)의 상소를 통해 드러났다. 삼복(三福)이라 불리는 복창군, 복선군(福善君), 복평군은 숙종과 친밀한 5촌 당숙으로, 외가인 동복오씨를 매개로 남인과 연계되어 있었다.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은 복창군 형제를 두둔하며 김우명의 무고로 사건을 몰아갔다. 급박한 상황에서, 명성왕후는 직접 선정전에 나아가 소리내 울면서 죄상을 밝히는 역할을 다했다.


   송시열은 명성왕후의 적극적인 행위로 복창군 형제의 죄가 밝혀졌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명성왕후가 관용을 베풀어 사형이 아닌 유배형의 처벌을 숙종에게 권했다고 서술했다. 삼복과 윤휴·허목 등 남인 세력에 휘둘리는 숙종과 달리 명성왕후는 시비를 분별하고 관용까지 베푸는 인물로 칭송되었는데, 이러한 서술은 간접적으로 숙종의 무능함을 드러낸다. 또한 송시열은 홍수지변을 통해 아버지를 구하려는 명성왕후의 효성을 강조하고, 남인 허견(許堅)의 악행을 인용하여 명성왕후의 관용을 부각시켰다. 명성왕후의 덕을 칭송하는 것인지, 남인의 패악을 비난하는 것이지 알 수 없는 전도된 서술이 이루어졌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희빈장씨의 소생을 원자(元子)로 정하는 데 반대한 서인들이 축출되었다. 이어 송시열은 사사되었고, 송시열이 찬술한 지문은 개수(改修)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지문은 일반적인 지문의 체재와 크게 다르다는 점에서, 송시열이 마음 속의 원한을 풀고자 한 것으로 지적되었다. ‘역적 토벌’을 운운하며 정치성을 드러내는 송시열의 서술은 지문에 실릴 수 없는 내용이었다. 송시열의 지문은 “거짓을 꾸며 남을 해친 옥사를 진실로 만들려 했기 때문에, 어의(語義)가 음흉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숙종은 “절대로 그냥 둘 수 없으니 속히 개찬(改撰)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면서, 인경왕후와 명성왕후 지문의 개찬을 명했다.


   이에 1690년 권유(權愈)가 인경왕후의 지문을, 민암(閔黯)이 명성왕후의 지문을 개찬했다. 개찬의 명분에 맞게 지문의 형식을 중시했지만, 말미에 개찬의 배경을 서술하면서 정치성을 드러냈다. 민암은 “간신이 붓을 잡고, 자기의 뜻을 덧붙여 거짓을 꾸며냈다.”는 숙종의 뜻을 개찬의 이유로 기록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권유는 “송시열이 지은 지문은 불경하게 지은 글 속에 음흉하게 해치는 말이 많고”, “친경례와 친잠례에 대한 설은 은밀한 것을 찾아내어 궤변을 만들고 우리 왕후의 덕으로 귀결시키니, 성총을 기만하고 후인을 속인 것이다.”라고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지문을 개찬하더라도, 이미 산릉에 매장되어 있는 지문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숙종은 개찬한 지문을 “사관(史官)에게 주어 사책(史冊)에 쓰게 하겠다”고 결정했다. 비록 산릉에 묻지는 못하지만, 실록에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개찬한 지문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숙종실록』과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에는 모두 송시열이 찬술한 지문이 수록되었고, 승자(勝者)인 서인의 기억이 역사로 남게 되었다.


   왕과 왕비의 지문은 단지 개인의 일대기가 아닌 국가적 사건과 연계된 기록이라는 점에서, 한 시대의 기억을 새기는 것이다. 송시열이 인경왕후와 명성왕후의 지문에 남인을 비판하는 정치성을 담은 것은 이러한 지문의 위상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송시열의 시도는 ‘지문의 개찬’이라는 정치적 반격으로 이어졌고, 역설적으로 지문의 ‘무정치성’을 강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