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AI시대의 인간정체성

김백희 사진
김백희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책임연구원

구로망기(鷗鷺忘機)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바닷가에서 갈매기와 해오라기가 자유롭게 노는 것을 보며 고단한 세상일을 잊는다는 뜻으로, 자연 속에 은둔하면서 속세의 일을 잊고 사는 한가로운 삶을 이르는 말이다. 곤궁했던 옛 선비들이 추구하는 멋진 인생의 한 모습이지만, 물질적 풍요가 넘쳐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사는 현재는 실현 불가능한 꿈이다. 지구 위에 AI의 눈을 벗어날 수 있는 자연세계와 개별 존재자들은 근본적으로 없다. 하늘에는 수많은 인공위성이 우리의 일상을 감시하고 있으며, 도시와 시골에서는 건물과 거리 곳곳에 설치된 많은 감시카메라들이 우리의 삶을 감찰하고 있다. 심지어 자기 스스로 자가용 자동차 안에 부착하는 녹화용 카메라는 타인과 자신의 행동거지를 동시에 감시한다. 그리고 하루 한 순간도 몸에서 떼어 놓기 어려운 애증(愛憎)의 스마트폰은 자발적으로 사용료라는 명목으로 거대자본에 돈을 납부하면서까지 자신의 삶을 감시의 연결망 속에 구속시킨다. 이 모든 감시와 연결 속에는 분야별 고도화의 차이는 있지만 'AI의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AI 즉 인공지능(人工知能, Artificial Intelligence)은 인간이 개발한 기술의 하나일 뿐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보조하기 위한 도구로서 컴퓨터를 사용한다. 그리고 컴퓨터의 성능을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사고(思考)나 학습 등 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을 컴퓨터에 부여하였다. 이렇게 하여 단순한 기계인 컴퓨터가 기계와 다른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사유능력을 갖게 된 것인데, 이런 기술의 결과로 등장한 인공지능 컴퓨터는 인간의 지적능력을 위협할 정도로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바둑 분야에서 한 예를 들자면, 2016년 3월에 당시 세계 최고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던 한국의 이세돌 9단은 ㈜구글 산하의 딥마인드라는 회사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5차례의 대국을 두었다. 결과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4:1로 알파고가 승리했다. 그나마 이세돌 9단은 인공지능 알파고와 겨루어서 1승을 거둔 유일한 인간이 되었다. 이미 인간의 능력으로 인공지능 알파고를 이길 수 있는 단계가 지난 것이다. 사고나 학습 그리고 진단과 처방 등의 수준에서 인공지능은 이미 인간보다 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ai 인공지능의 이미지 사진

2021년 현재 인간의 문명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의 단계는 AI로 대표되는 기술융합 시대다. 기계적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물리적 공간과 생명의 가치가 기준이 되는 생물학적 공간의 구별이 없어지고 있다. 사람보다 더 뛰어난 매력을 발산하는 사이보그(cyborg), 하늘과 땅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목표를 장악하는 드론(drone), 김치냉장고나 밥솥에 붙어서 요리사보다 뛰어난 맛을 요리해 내는 사물인터넷 등을 보면, 인공지능은 이미 삶의 주변 곳곳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미 인공지능의 편리함이 없는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종속된 지경에 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계인 인공지능이 생명체인 인간의 사유능력을 넘어서는 시대에 서 있는 지구의 작은 생명체임을 자각할 때이다. 이제 우리는 여러 가지 상념을 갖게 된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문명은 인간(Human being)과 기계(Machine)의 영역이 모호해지는 단계를 넘어서, 서로 만나 합일하는 특별한 지점(Singularity)으로 가고 있다. 그 다음에는 기계로서의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 자발적으로 진화하는 단계로 갈 수 있다. 인류문명의 진화단계에서 인간은 기계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만든 기계로부터 소외(疏外)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삶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는 어색한 지경에 서 있다. 우리의 소박한 희망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문명이 생명가치를 존중하는 인간의 영역과 인간의 생명을 원만하게 보조하는 인공지능의 영역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이지만, 이런 꿈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인간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하여 질문하고 반성하며 사색하면서 새로운 삶을 영위해야만 인공지능과 같은 기계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이 기계와 다르게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본질은 무엇인가? 동서고금의 철학 속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답이 있다. 예컨대 우리 문화가 포함된 전통 속에서 구할 수 있는 하나의 답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다. 생명을 불쌍히 여겨 사랑하는 마음,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이치에 따르며 겸손히 양보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 신의를 지키려 실천하는 굳건한 마음 등이 인간의 본질과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라는 것이다. 이런 마음과 실천이 없으면 사람이 아닌 것(things)이 된다. 기계나 사물은 인의예지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조건은 기계의 조건과 다르다. 인간은 인생의 행로에서 기쁘게 웃기도 하지만 괴로워하고 불안해하는 실존적 존재이다. 우리는 아름다움과 선(善)한 삶을 추구하는 근원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으며, 희생과 봉사와 자비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려는 도심(道心)도 있다. 노쇠하여 병상에 누워 계신 어버이의 회복을 기원하는 간절한 소망과 어버이를 건강하게 오래도록 봉양하고 싶은 효심이 있다. 인간은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탐구하며 실천할 때만, 동물이나 기계와 다른 인간이 된다. 아무리 AI가 발전한다 하여도 인간의 정체성과 실천적 삶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반성하며 산다면, 우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문명 속에서 자아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인생의 바른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