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수빈박씨? 유빈박씨?

박용만 사진
박용만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수석연구원

10여 년 전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자료집을 만들기 위해 소령원(昭寧園)을 답사하다가 그 옆에 있는 정빈이씨의 원소(園所)인 유길원(綏吉園)도 함께 조사하였다. 그때 미술사 교수님이 ‘綏’자의 음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일반적인 음으로는 ‘수’인데 또 ‘유’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문제제기에 함께 조사하던 동료들은 여러 문화재정보 등에 나온 대로 ‘수’로 읽는 것이 타당하겠다는 의견이었다.


중요한 문제의식이었지만 조선시대 왕실문화를 조사하는 장서각 연구원들은 그냥 넘어갔고 이후에도 ‘수’로 표기하였다. 다시 몇 년이 지나 정조와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다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유빈박씨(綏嬪朴氏, 1770∼1822)의 애책문(哀冊文)과 상시문(上諡文)을 보게 되었다. 장서각에는 이 애책문과 상시문의 한글본과 한문본이 함께 소장되어 있는데, 모두 한문본의 ‘綏嬪’을 한글본에서는 ‘유빈’으로 적었다. 이 자료 모두 고급 장지에 붉은 인찰선을 그린 뒤 각 칸에 한 글자씩 정성스럽게 글씨를 썼다. 실제 책문을 제작할 수 있도록 동일하게 상시문 9면, 애책문 10면으로 제작하였다. 애책문(哀冊文)은 애사(哀辭)의 일종으로 특히 왕과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글을 말한다. 상시문(上諡文)은 돌아가신 왕이나 왕비의 시호를 임금에게 아뢸 때 그 생전의 덕행을 칭송하는 글이다. 모두 국왕과 왕비의 죽음에 올리는 글이지만, 후궁의 경우에도 종종 보이는 문체이다.


유빈박씨는 1822년 12월 26일 별세하여 3개월 뒤인 1823년 2월 27일 장례를 치렀다. 이 상시문은 2월 20일 순조가 유빈박씨에게 올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정작 글을 지은 사람은 호조판서 심상규(沈象奎)였다. 판부사 남공철이 지어 올린 애책문은 본문 중에 “계미이월신튝삭이십칠일”이라 하여 1823년 2월 27일에 올린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글본은 누가 필사하여 어떤 용도로 사용했을까? 유빈박씨에게 올리는 상시문과 애책문은 빈궁(殯宮)에 나아가 읽어야 하지만 남성들은 후궁의 빈궁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따라서 왕실에서는 상궁을 통해 읽게 하였는데, 문제는 상궁들이 한자에 능숙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한문으로 된 상시문과 애책문을 다시 음을 한글로 필사하여 상궁에게 대신 읽게 하였다. 이 자료는 후대에 필사한 것이 아니라 의례를 행하던 당시에 사용된 것이 분명한 만큼 1823년 시점에 왕실에서는 ‘유빈’으로 발음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현재 발음 역시 ‘수’가 아니라 ‘유’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이유로 장서각에서는 ‘수빈박씨’가 아닌 ‘유빈박씨’로 통일하여 표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綏’자를 ‘유’로 읽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서두에서 말한 정빈이씨의 ‘綏吉園’이나 영빈이씨의 ‘綏慶園’을 어떻게 읽은 것인가? 또 조선시대 품계인 ‘綏祿大夫’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장서각은 왕실의 원소인 ‘綏吉園’을 ‘유길원’, ‘綏慶園’을 ‘유경원’으로 표기하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관품(官品)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섣부르게 결정할 수는 없어 ‘수록대부’로 표기하기로 정하였다. 이러한 장서각의 합의는 언제든 타당한 자료가 제시된다면 정정할 수 있는 것이다.


100년 전, 200년 전 우리의 역사에 대해 지금의 우리는 너무 무지하다. 장서각의 자료를 보다보면 작지만 의미 있는 사례를 찾아 읽는 재미가 있다. 역사는 선(線)이지만 역사의 기록은 점(點)이다. 작지만 의미 있는 기록을 찾아 점과 점 사이의 알려지지 않은 빈칸을 합리적으로 유추하며 채워가는 것이 원 자료를 보는 이들의 책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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