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조선의 무관과 무과방목

정해은 사진
정해은
한국학사전편찬부 백과사전편찬실 책임연구원
1. 조선왕조에서 무관의 존재

오늘날 경복궁 근정전이나 덕수궁 중화전의 앞에는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 좌우로 품계석(品階石)이 놓여 있다. 남쪽을 향해 앉는 임금을 바라보고 오른쪽(동쪽)에 있는 품계석이 문관이 서는 자리였고 왼쪽(서쪽)이 무관이 서는 자리였다. 그래서 문관을 동반(東班), 무관을 서반(西班)이라고 했으며, 이 둘을 합쳐 ‘양반(兩班)’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국가의 모든 일을 실제로 담당한 사람은 문관과 무관으로 구성된 ‘양반’이었다. 그런데 문치주의(文治主義) 사회를 지향한 조선에서는 활과 칼을 든 무관보다 붓을 든 문관이 우위를 차지했다. 곧 조선 왕조는 문관을 중심으로 한 양반 관료의 나라였다.

문치주의는 신라가 7세기 후반에 삼국을 통일한 이후 당(唐)의 중앙집권체제를 받아들인 것이 단초였다. 신라는 삼국 통일의 과정에서 군사력으로 당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생존을 위해 문치와 외교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유교 소양으로 무장한 문관이 정치 주체로 자리 잡은 문치주의는 고려 왕조를 거쳐 조선 초에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문치주의 안에서 무관은 문관의 하위 동료이자 아웃사이더였다. 무관은 양반 안에서도 부차적인 지위에 머물렀고 사회 위상도 문관에 비해 낮았다. 역사학자 김석형(金錫亨, 1915~1996)은 문관을 숭상하고 무관을 천시하는 현상에 대해 “양반의 척도로써 양반을 구분하는 것”이라 보았다.

이런 배경으로 현재 양반 관료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지배 엘리트인 문관에 대한 관심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에 비해 무관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높지 않아서 무과나 무과급제자에 대한 연구 성과도 문관이나 문과에 비해 빈약한 편이다.



2. 방목이란 무엇인가?

조선시대에 무관이 되는 길은 크게 두 가지였다. 무과에 급제하든지 선조의 공적으로 문음(門蔭)을 받는 길이었다. 그런데 문음을 통해 관료가 된 사람은 요직이나 고급 관직에 진출하기 쉽지 않았으므로 문음으로 관리가 된 뒤에 과거를 다시 치르는 경향이 많았다. 양반이 가장 영예로운 관직 진출 수단으로 여긴 것은 과거를 통한 성취였고, 무과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시대 문과는 1393년(태조 2)부터 시행했고 무과는 1402년(태종2)부터 시행했다. 1402년에 무과를 시행한 이후부터 문과와 무과는 ‘대거對擧’라 하여 짝이 되어서 한쪽을 실시하면 다른 쪽도 반드시 함께 실시했다. 그래서 임진왜란시기 군사 확보를 위해 무과만 따로 시행한 사례를 제외하고 문과와 무과는 동시에 실시되었다.

방목은 합격자 명부이므로 문과·무과·생원진사시·잡과 모두 작성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과거급제자 명단을 수록한 『등과록(登科錄)』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에 과거 급제란 공적(公的)으로 기록이 명확하고 국가에서 발행하는 합격증도 있어야 하므로 쉽사리 위조하거나 침범할 수 없는 개인의 이력이었다. 집안 내력과 개인 이력이 위조되기도 한 조선 사회에서 과거 급제와 같은 정확한 이력은 개인의 출신 배경을 잘 드러내는 지표였다. 그래서 과거급제자 명단을 수록한 방목은 개인의 사회적 위상을 측정할 때 높은 공신력을 담보했다.

여러 과거 중 문과는 급제자 전원을 집성한 종합방목이 있어서 조선시대 전체 급제자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문과는 『국조방목(國朝榜目)』(1393~1894)처럼 국가에서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전체를 집성한 종합방목이 존재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문과는 여러 형태로 급제자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도 다양한 편이다.

이에 비해 문과의 짝으로 실시한 무과는 상대적으로 급제자의 기록이 열악한 편이다. 무과방목은 문과처럼 급제자 전체를 집성한 종합방목이 없다. 다만 1회분의 무과급제자만 실어놓은 단회방목(單回榜目)이 있을 뿐이다. 단회방목은 앞쪽에 문과급제자를 배치하고 뒤쪽에 무과급제자를 수록한 ‘문무과방목’의 합본 형태다. 이 문무과방목을 ‘용호방(龍虎榜)’이라 하는데, 용방은 문과방목을 지칭하며 호방은 무과방목을 의미한다.

단회방목의 경우 표지 제목에 ‘○○문과방목’이라 되어있어도 대부분 뒷부분에 무과방목이 들어 있다. 예컨대 『경자식년문무과방목(庚子式年文武科榜目』(1660년)도 표지 제목이 ‘경자식년문과방목’이며, 표지의 오른쪽 상단에 ‘부호방(附虎榜)’이라 되어있다. ‘부호방’이란 무과방목을 덧붙였다는 뜻이다. 문무과방목을 문과방목이라 한 이유는 문치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갑자증광문무과방목(甲子增廣文武科榜目)』, 장서각 기탁자료(원소장처 : 상주 진주정씨 우복 정경세 종가)

『갑자증광문무과방목(甲子增廣文武科榜目)』, 장서각 기탁자료(원소장처 : 상주 진주정씨 우복 정경세 종가)
1624년(인조 2)에 실시한 증광 문과 및 증광 무과의 급제자 명부다.
화살표로 표시한 바와 같이 앞에 문과방목이 있고 무과방목은 뒤쪽에 배치된다.

3. 무과방목은 현재 얼마나 남아있을까?

방목은 합격자 명부이므로 과거를 실시할 때마다 만들었다. 조선시대 무과는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의 세 단계가 있었다. 식년시·증광시는 세 단계를 모두 거쳤으며, 각종별시는 복시를 생략하고 초시와 전시만 치렀다. 무과방목 역시 단계별로 초시방목·복시방목·전시방목을 각각 제작했다. 참고로 복시는 회시(會試)라고도 했다.

그런데 보통 ‘방목’이라 하면 과거의 최종 급제자 명부인 전시방목을 말한다. 현전하는 무과방목은 1회분의 급제자만 실은 단회방목으로 총 167회분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무과는 1402년(태종 2)에 처음 시행한 이후로 1894년(고종 31) 폐지할 때까지 총 800회를 시행했다. 따라서 현재 무과방목은 전체의 약 21% 정도 남아있는 셈이어서 다른 과거에 비해 가장 적은 분량이다.


현전하는 조선시대 무과방목 현황 (2020년 10월 현재)

현전하는 조선시대 무과방목 현황 (2020년 10월 현재)

전거1) 정해은, 『조선의 무관과 양반사회』(역사산책, 2020)
전거2) 이재옥, 『조선시대 과거합격자의 디지털 아카이브와 인적 관계망』(보고사, 2018)


문과방목은 1393년(태조 2)부터 1894년까지 전체 문과급제자를 집성한 『국조방목』이 있으므로 100% 현전하는 셈이다. 사마방목은 총 230회의 시험 가운데 186회분(약 80%)이 현전한다. 잡과는 총 233회의 시험 중 177회분(76.4%)이 현전한다.

현전하는 무과방목 중에는 방목의 형태가 아니라 각종 문헌에 실린 것도 있다. 순암 안정복(安鼎福)의 저서인 『잡동산이(雜同散異)』에 수록된 1519년(중종 14)의 별시 방목과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수록된 1795년(정조 19)의 정시 방목이 대표적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1797년 간행)는 1795년에 화성에서 열린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의궤다.

오늘날 현전하는 무과방목 중 가장 오래된 방목은 1453년(단종 1) 식년시 급제자를 수록한 『경태사년십일월초일일무과방목(景泰四年十一月初一日武科榜目)』이다. 이 방목은 경상남도 거창의 초계 정씨(草溪鄭氏)의 집안에 전해오는 『선광정사진사방(宣光丁巳進士榜)』(1377년)의 이면에 필사된 형태로 전해오고 있다. 이 방목은 단독으로 엮은 무과방목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무과급제자 중 가장 이른 시기의 명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위의 <표>에서 현전하는 무과방목의 현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의 무과방목은 드문 편이며 대부분 17∼18세기에 집중되어 있다. 단종을 제외하고 태종∼연산 대까지의 무과방목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숙종 대가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순조 대 이후로 남아 있는 방목은 매우 적은 편이다.


4. 무과방목의 가치

조선시대에 과거 급제는 관직을 보장받는 길이므로 개인의 영예일 뿐 아니라 집안의 영광이었다. 그리고 고급 관리가 되려면 반드시 문과에 급제해야 했다. 이 때문에 일생을 과거 준비에 소비한 사람들도 비일비재했고, 그만큼 과거 급제는 국왕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점은 과거급제자의 나이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34,874명 가운데 50세 이상이 3,432명(9.8%)이며, 70세 이상도 952명(2.7%)이나 된다. 문과도 정조~철종 연간에 급제한 2,755명 중 50세 이상이 406명(14.7%)이다. 무과도 조선 후기 무과방목에서 나이를 알 수 있는 15,676명을 대상으로 통계를 내본 결과 50세 이상이 1,434명(9.1%)였다.

문과·무과의 급제자 및 생원진사시 합격자 중 50세 이상이 10~15%의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은 10명 중 최소 1명은 평균 50세 이상이라는 의미이자 과거 응시가 장기간 지속되었음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문과에서 50세 이상의 급제자가 15%에 육박하는 현실은 문과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준다.

과거가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집중적으로 받다보니 급제자가 본인의 정보를 임의로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 점은 1회분의 급제자 명단인 단회방목의 간행 과정을 보면 더 확연하다. 방목은 중앙 정부와 개인이 간행했다.

중앙 정부에서는 교서관에서 필요한 부수를 간행해서 문과방목은 의정부·예조·성균관에, 무과방목은 병조에 보관했다. 중앙 정부에서 방목을 인쇄해 급제자에게 나눠준 경우는 특별한 은전이었다. 그래서 급제자들은 개별적으로 동년끼리 급제의 영예를 기념하고 공유하기 위해 방목을 간행하기도 했다. 또 후손이 선조의 영예를 기리거나 유실된 기록을 복원하기 위해 간행한 경우도 있다.

한편, 동년(同年: 급제 동기)끼리는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면서 친밀감이 남달랐다. “옛사람들은 동년을 마치 형제처럼 여겨 만나면 친밀하게 대하고 보지 못하면 그리워했다. 그 자제들도 길에 나가서 아버지나 형의 동년을 만나면 먼저 말에서 내려 존경을 나타낸 것도 진실로 부형이 형제처럼 여겨 항상 친밀해하고 늘 사모했기 때문이다”라고 하듯이 서로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무과급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재항(李載恒, 1672∼1725)은 1706년(숙종 32) 정시 무과에 병과 177등으로 급제했으며, 1725년에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했다. 그리고 부임지에서 방목을 간행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자 이듬해인 1726년에 방목을 간행했다. 무과에 급제한 지 20년 만의 일이었다. 이재항은 이 방목의 서문에서 동년 사이의 돈독한 관계를 아래와 같이 과시했다.

“동방인은 비록 사소한 친분이나 안면이 없더라도 서로 친애하는 마음이 말[馬]을 세우고 해후할 때에 저절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니 곧 인정인 것이다. 어찌 억지로 될 일인가!”

이처럼 방목이란 동년 사이에서 과거 급제라는 공통분모를 매개로 공유하는 기록물이었다. 이런 연유로 급제자가 본인의 정보를 속이거나 변조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상대방 이름만 듣고도 그 사람의 집안 내력을 단박에 알 수 있을 만큼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은 사회에서 방목의 변조나 위조는 거의 불가능했다고 여겨진다.

무과방목에는 급제자의 전력·본관·거주지 및 아버지의 이름과 직역, 형제 이름, 부모의 생존여부 등을 수록했다. 전력은 급제자가 어떤 분야에 있다가 무과에 투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본관이나 거주지를 통해서는 급제자의 혈연관계나 지역 연고를 파악할 수 있다. 아버지의 직역이나 형제 기록은 급제자 집안의 위상은 물론 급제자가 적자인지 서얼인지를 판별할 수 있다. 또 시험 관련 정보도 빼곡히 들어 있다.

무과방목에 실린 이러한 내용들은 호적이나 족보에 비해 위조나 변조가 불가능했다. 과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동년 사이의 남다른 친밀감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과방목은 위조나 변조가 거의 불가능한 사료로서 무과급제자뿐만 아니라 무과 운영의 큰 틀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 자료로서 대단히 귀중한 가치를 갖는다.

‘양반’이라는 화두는 단순히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주제다. 조선시대 양반에 대한 지식이 현대에도 살아있으며, 그 집안이 어떤 집안이었는지가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양반이라는 화두는 여전히 매력을 갖는다. 하지만 오늘날 양반에 대한 인식에는 문관만 존재하고 무관은 빠져있다.

무과방목은 무관의 예비후보군을 형성한 무과급제자에 대한 자료다. 그래서 많은 분들의 관심이 절실히 필요하며, 지금까지 무과방목이 꾸준히 발굴되었듯이 향후에도 더 발굴이 이뤄지기를 고대한다.


1for2@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