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조선시대 두창(痘瘡)과 마마신

이 욱 사진
이 욱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연구원

1796년 9월 22일에 정조는 옹주[淑善翁主, 1793-1836]가 두창(痘瘡)에 걸린 것을 발견하였다. 며칠 전부터 체한 것 같은 증세로 열이 나던 옹주는 이날 손발에 반점이 돋았다. 정조는 즉시 방외(方外)의 두창 전문 의원을 불러 진찰하게 하고, 원자와 함께 이문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런 빠른 진단과 대처에서 알 수 있듯이 정조는 두창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1761년(영조 37)에 이미 마마를 앓았고, 당시에 궁궐 내부라도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결과였다.


궁궐의 전염병 피해 사례로 숙종대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1680년에 숙종비 인경왕후(1661-1780)가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였고, 1683년(숙종 9)에 숙종이 두창에 걸렸지만 다행히 회복되었다. 이를 축하하여 이현석(1647-1703)이 지어올린 성두가(聖痘歌)는 이후 고사가 되었다. 당시 궁궐에서 무당을 맞이하여 마마신을 보내는 굿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대비 명성왕후가 못하도록 제지하였다. 대신 나라에서는 진연을 베풀어 회복을 축하하였다. 그런데 정조는 마마신을 보내는 의식을 궁궐 내에서 실시하였다. 물론 무당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관리들이 수행한 것이지만 그 절차는 마마 배송굿과 유사하였다.


9월 25일부터 옹주의 볼에 구슬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고 곪을 기미가 보였다. 그리고 같은 달 30일부터 딱지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0월 4일에 마마신을 보내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의례가 시작되자 볏짚으로 만든 마마신에게 헌주(獻酒)와 집사자들이 절하고 술을 바친 후 신을 받들고 상마소(上馬所)로 나와 말에 태웠다. 그리고 선독관이 무릎을 꿇고 송신문(送神文)을 읽은 후 말을 인도하여 통화문 밖에 나아가 절을 하고 보냈다. 이날 송신문은 정조가 직접 지었다. 글에서 정조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신도 사랑하였도다”라며 마마가 옹주에게 들어와 두 볼에 반점이 돋고, 구슬 안에 고름이 맺히고 짓무르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그리고 찰떡을 빚고 악기를 두드리며 술을 권하여 보내는 과정을 적은 후 떠나는 신에게 자손의 장수와 창성(昌盛)을 기원하며 글을 마쳤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전염병 중에 하나였던 두창은 천연두(天然痘), 마마, 호역 등으로 불리었다. 두창을 손님이나 마마신로 신격화하고 의례화하는 것은 주로 무당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유학자들은 이를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도 ‘마마신을 보내는 글[송두신문]’을 지어 부분적이나마 그 의례에 참여하였다. 글을 지어 간단한 예식과 함께 신을 전송한 것이다. 그러한 경향이 궁궐에까지 확산되어 앞서 살핀 정조의 글과 의식을 볼 수 있었다.

『홍재전서』권56, 「송두신문(送痘神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홍재전서』 권56, 「송두신문(送痘神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두창의 마마신은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신으로 숭상할 정도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신이었다. 그러나 두창에 대한 반응을 두려움과 회피만으로 설명하긴 어렵다. 김매순(1776-1840)은 마마의 신을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유학에서 이를 말하지 않았기에 자신 또한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마마신의 존재를 부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송두신문(送痘神文)」에서 김매순은 마마신에게 약한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고, 유약한 사람을 굳세게 만드는 공로가 있다고 하였다. 김매순을 비롯한 유자들이 두창을 신으로 인정한 까닭은 그것이 “사람됨(爲人)”의 관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숙종 대 성두가를 지었던 이현석은 이를 “옥성지공(玉成之功)”이라 하였다. 옥으로 만들어 주는 공로란 말이다.


질병이 무슨 공로가 있겠는가?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질병을 의학적 지식이 아닌 실존으로 대한다. 질병에 걸린 사람뿐 아니라 질병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질병이 걸렸을 때 가장 단순한 물음, 왜 이런 질병이 ‘하필’ 나에게, 내 가족에 왔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의학에서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어진 질병을 의미론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면 이겨내지 못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고운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딱딱하게 변한 내 얼굴, 또는 사랑스러운 자식의 얼굴을 바라보며 성인(成人)으로 가는 길목이라 인내하며 참았다.


코로나 사태 이후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우리는 이제 코로나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미지의 변화를 겪고 있다. 마음껏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살갑게 만나던 지난날이 유년의 추억처럼 그립다. 이 변화가 실직과 파산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 질병에 걸리는 것보다 어제 끝날지 모르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우리를 어렵게 만든다. 무력감에 빠지는 이때 “코로나 바이러스 신(神)”을 보낼 그 날을 꿈꾸고 그가 나에게 끼친 공로가 무엇인지를 헤아리며 하루하루를 인내할 뿐이다.


leewk@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