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행간의 뜻 읽기와 텍스트 비평

김덕수사진
김덕수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장

이태 전에 서원 관련 연구과제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한국 서원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던 시기였는데 서원에 대한 인문학적 성과를 축적하기 위해 기획된 듯하다. 당시 필자에게 ‘할당’된 서원은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이었다. 귤림서원에 배향된 인물은 김정(金淨), 송인수(宋麟壽), 정온(鄭蘊), 김상헌(金尙憲), 송시열(宋時烈)이다. 필자는 전공이 한문학이므로 ‘김정의 제주 유배생활’에 대해 쓰기로 정했다. 김정이 누구인가. 14세에 별시 초시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19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3년 뒤 문과 장원을 거머쥐고 다시 1년 뒤 정시에서 장원하고 20대에 두 차례나 사가독서에 피선된 인물이다. 더욱이 박상(朴祥)과 함께 당시(唐詩)와 진한고문(秦漢古文)을 전범으로 삼아 기건한 풍격으로 문단의 풍조를 일신했고 나이 서른넷에 육경의 반열에 올랐다.


기존 논문을 검토하면서 󰡔충암집󰡕에 실린 「해도록(海島錄)」과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을 읽어보았다. 「해도록」은 제주 시편을 묶은 시록(詩錄)이고 「제주풍토록」은 제주 풍토와 유배 일상을 기술한 산문이다. 자료와 씨름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째, 기존 연구 성과에 의하면 김정이 제주에 유배되어 사사되기까지 14개월 동안 교유하거나 소통한 인물이 일부 제주 토착민과 제주목사에 한정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김정이 죽기 전까지 내륙의 친지에게 철저히 잊혀진 존재였다는 뜻이다. 둘째, 「제주풍토록」에 모호한 표현이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이런 부분은 구두점을 찍기도 어렵거니와 정확한 의미 추론이 불가능해 보였다. 필자는 자료 범주를 확장하는 한편, 해당 텍스트를 다시 꼼꼼하게 읽어 나갔다. 오래지 않아 두 가지 의문을 어느 정도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김정의 위리안치 공간과 일상」을 연구과제 결과물로 제출한 뒤, 이듬해에 「제주 유배객 충암의 교유와 감춰진 이름들」과 「제주풍토록의 텍스트 비평」 두 편의 논문을 학술지에 투고했다.


「제주 유배객 충암의 교유와 감춰진 이름들」에서는 문집 간행 과정과 「해도록」 출현 시점, 주석이 가감되고 작품의 소종래가 자의적으로 판단된 점, 󰡔제주일기󰡕의 존재 양상 등을 서술한 뒤, 내륙의 지인과 교유하고 소통한 정황을 논증했다. 기묘사화 직후의 삼엄한 정국 때문에 김정이 교유 인물의 실체를 교묘히 감춘 것이다. 예컨대 덕우(德優) 신영희(辛永禧)의 시에 차운하면서 제목에는 성씨를 바꾸어 이덕우(李德優)라 적었고, 제주까지 직접 찾아온 안처순(安處順)을 전송하는 작품에서는 자호(字號) 등의 호칭을 생략한 채 안자(安子)라고만 적었다. 또한 승려를 통해 짤막한 시편으로 신명인(申命仁)과 서로의 속내를 교환했고 체임하는 제주목사 이윤번(李允蕃)과 사적으로 만나 연구시(聯句詩)까지 주고받았다. 하지만 대상 인물은 문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자칫 훈구파의 감시망에 포착된다면 본인뿐만 아니라 상대방까지 중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화나 당쟁, 역모 등에 연루되어 유배된 문인의 문학을 연구할 때 정국의 추이와 저자의 주변여건에 대한 검토가 필히 선행되어야 한다. 문자로 앉혀진 기록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그림 김정, <제주풍토록>(1521년) 앞부분

김정, <제주풍토록>(1521년) 앞부분


「제주풍토록의 텍스트 비평」에서는 「제주풍토록」의 제목과 수신자, 찬술 시기, 활용 전적, 정보 제공 인물, 후대 문학에 끼친 영향에 대해 기술하고 나서, 「제주풍토록」 텍스트의 오류를 검토했다. 초간본과 중간본을 비교해보면 중간본 간행 시, 초간본의 오류나 어색한 표현을 상당부분 수정하기도 했으나, 초간본의 합당한 표현이 엉뚱하게 판각된 사례가 여럿 보인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입력본 DB를 제작할 때 문집의 글자를 오독한 경우도 빈번하다. 이밖에 불완전한 표현과 글자들이 자주 나타나는데, 애초에 행초로 적힌 편지가 일부 손상되었고 훗날 그것을 탈초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로 여겨진다. 따라서 「제주풍토록」을 활용할 때 텍스트 오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교감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이것은 「제주풍토록」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저자 사후에 타인이 유고를 수습하여 교정과 편차를 담당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더욱이 수습한 원고가 행초서로 쓰인 경우에는 시간의 추이에 따라 지면이 손상되거나 글자가 결락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훗날 탈초하여 정고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밖에 판각 과정에서 각수(刻手)가 저지른 오류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근자에 각종 고문헌의 정서본(正書本)을 만드는 단계에서 기존 오류를 답습하거나 판독상의 새로운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텍스트 교감과 비평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텍스트를 맹신한 채 도출한 결과는 일순간 사상누각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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