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연 사람들

온라인과 연결된 빠른 속도의 소통이 현재의 한국음악의 한류를 가져온 요인 같아요

예술과 학문이 아주 잘 어우러진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교수 초빙 강의때 독특한 복장과 강연 주제로 인해 청중들의 관심을 끌었던 한국학대학원 조일동 교수를 만나보았다.


조일동 사진

안녕하세요? 연구원에 오신지 대략 7개월 정도 되셨네요. 전공하신 사회문화인류학은 어떤 학문입니까?


제가 전공한 문화인류학이라는 학문이 다루는 분야가 매우 광범위합니다. 그중에서 저의 세부 전공 분야가 사회문화인류학입니다. 현대 인류학은 대서양 양쪽에서 발전했는데, 영국과 미국의 학문적 성향이 다소 달랐습니다. 영국의 인류학은 식민지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비서구사회에 대한 이해가 절실했다면, 미국에서는 항상 연구가 가능한 비서구문화 – 미국인디언 문화가 일상과 멀지 않은 영역에 존재했습니다. 미국이 점차 산업화, 도시화 되는 과정에서 인디언이 살고 있던 지역에 대한 개발이 불가피해졌고, 일종의 구제(救濟) 인류학 조사가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덕분에 미국의 문화인류학은 인디언 주거지역에 대한 (선사)고고학적 자료 수집부터, 형질인류학, 언어인류학, 그리고 생활양식과 문화 전반에 대한 사회문화인류학 연구가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고고학부터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문화까지 아우르는 미국식 문화인류학의 영향을 받은 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만, 현실의 사회문제에 천착하는 연구에 좀 더 경도되었던 것 같습니다.


현대 대중예술부터 사회 참여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역의 논문을 발표하셨는데요. 인류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어려서부터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장녀였던 어머니가 서울에 살게 되면서, 외삼촌과 이모들이 우리집에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우연히도 그분들이 영문학을 전공하셨고, 특히 영미 대중음악과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미국 소설을 번역하는 일을 하기도 하셨구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사진 중에는 비틀즈 음반이 걸려있는 전축 앞에서 춤추고 있는 제 모습이 있을 정도니까요. 음악을 포함한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음악인들과 그들의 문화를 연구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학문적 정체성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한편 대학 진학 후 지도교수님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일본 어린이집을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셨는데, 연구뿐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도 깊게 관여하는 학자셨습니다. 공동육아 운동을 시작하셨고, 북한 아동을 돕기 위한 실천이 북한 문화 연구로 발전한 분이셨습니다. 일본 연구가 일제강점기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징용자들의 시신 발굴 및 한국 귀향 캠페인으로 확장되기도 했구요. 지도교수님과 함께 다양한 연구 및 실천 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고, 그 영향이 자연스럽게 현실참여적인 연구자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 한국학대학원에서 어떤 강의를 하십니까? 대학원에 대한 첫 느낌은?


1학기에 ‘한국대중음악연구’라는 과목을 강의하였고, 2학기에는 ‘인류학과 인접학문’이라는 과목을 개설하여 정치학과 김원 교수님, 인류학과의 정헌목 교수님과 같이 ‘2000년대 한국사회의 쟁점’이라는 주제로 청년, 계급, 젠더, 다문화와 난민, 빈곤, 대중문화 등에 대해 다루는 세미나 강의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연구서나 논문 뿐 아니라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남긴 에세이, 현장에서 채록한 구술기록 등을 종합적으로 활용할 계획입니다.

강의하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한국학대학원에 외국인 학생이 많은데, 이들의 한국어 실력이 상당히 뛰어났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어 강의 진행에 큰 어려운 점이 없었으니까요. 다른 학교에서 외국인 학생을 상대로 강의할 때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영어 강의를 하거나 영어로 개별 과제를 준비하기도 했었는데, 한국학대학원의 외국인 학생들과 수업을 진행하면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수업에 관련된 자료 중 영어 원서가 있는 경우에는 한국어와 함께 읽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경우에는 영문 자료를 함께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편입니다.

올해 쓰신 논문 중에 “1990년대 한국대중음악 상상력의 변화”라는 논문은 어떤 논문입니까


현장 사진

논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이 좀 어렵긴 한데요(웃음). 한류를 평가하는 여러 시각 중에는 음악 형식이나 스타일이라는 측면에서 영미가 만든 대중음악의 글로벌 스탠다드에 한국이 가장 먼저 도달했을 뿐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 한류가 취하고 있는 음악 형식이 더 많은 문화로 확산되고 좀 더 보편화 된다면 한류는 사라질 것이라 보기도 합니다. 과연 그러할지 검토하려면 현대 대중음악의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것이 무엇일까 점검을 해봐야 했습니다.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되는데, 첫째 전자악기 기술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 둘째 기존 음원의 일부분을 추출하고 조합하여 새로운 음악으로 만드는 샘플링 기법 사용의 확대, 셋째 온라인과 연결된 빠른 속도의 확산과 소통 정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요소들은 현재의 한국 대중음악 혹은 한류라 불리는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고요.

전자악기와 샘플링 기술이 한국 대중음악에 소개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1990년대입니다. 저는 당시 도입된 샘플러와 신디사이저 같은 기술적 변화는 단순히 음악인이 가용할 수 있는 새로운 악기 하나가 더 생긴 수준이 아니라 음악적 상상력 자체를 바꿨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악이 이전과 달리 인터넷을 통해 국경 너머 어디든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상상력 변화에 일조를 했습니다. 음악을 만드는 과정 자체에도 큰 영향을 끼쳤죠. 이를테면 오랜 시간 음악을 만든다는 행위는 골방에서 피아노나 기타를 가지고 홀로 고독하게 고민한 산물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로 음악 동료는 물론이고 팬덤과도 PC통신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공간에서 소통하면서 음악 제작 과정 자체를 공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조언을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과 다른 물리적 토대가 마련된 셈이죠. 음악은 이제 개인의 창작 영역에서 공동체적인 관계 속에서 협력적 창작과정으로 변모한 겁니다.

물론 과거에도 음악적 교류는 존재했습니다. 그 형태는 주로 인맥으로 맺어진 소수의 인물들, 특히 엘리트 사이의 소통에 가까웠죠. 하지만 1990년대 PC통신을 통해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던 익명의 사람들과 음악을 매개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만들어졌고, 이는 현대 한국 대중음악 창작 형식의 특징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들이 겹쳐지면서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 모습을 만들었고, 나아가 한류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악기 연주도 직접 하시나요?


밴드 블랙홀 데뷔 30주년 헌정음반

밴드 블랙홀 데뷔 30주년 헌정음반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베이스기타를 연주 합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를 했어요. 사실 저는 보컬을 하고 싶었는데 고교 시절 막상 제가 공연한 음원을 들어보니 음정도 정확하지 않고, 박자도 틀리는 등 제 실력이 썩 만족스럽지가 못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베이스라는 악기로 돌아서게 되었죠(웃음). 악기를 연주하고 밴드를 했던 경험이 저의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학부 졸업 논문도 일생을 베이스를 연주했던 분의 생애사로 썼고요, 석사 논문은 홍대 근처에서 활동하는 인디 음악인의 사회적 정체성 형성 과정과 문화자본에 대해 썼습니다. 박사논문은 새로운 형태의 공연과 음반을 만들어내는 사이버스페이스 팬덤의 역동과 실천에 대해 연구했고요.

밴드를 하던 시절, 운이 좋아서 “깊은 밤의 서정곡”이라는 노래를 만든 블랙홀이라는 한국 헤비메탈의 큰 형님 같은 밴드의 공연 오프닝을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 밴드 블랙홀이 지난해 음반 데뷔 3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어린 시절 블랙홀과 가졌던 인연을 바탕으로 작년 블랙홀 데뷔 30주년 기념 헌정음반을 기획해서, 지금 활발히 활동 중인 후배 록음악인들이 블랙홀의 음악을 다시 부른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뿌듯한 경험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코로나 때문에 자주는 못가지만 평소에는 한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반드시 공연장을 찾아 새로운 음악을 듣고, 음악인들과 만남을 가지고자 노력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연구 방향이나 주제 등 계획을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조일동 사진

우선 한국 대중음악의 상상력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살피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외부에서 유입된 악기나 음악 사조가 한국 대중음악과 문화를 어떻게 변화시켰는데, 또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한국적인 방식으로 소화되었는지를 연구하고 싶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오게 되면서 잠깐 중단된 연구가 있는데, 이 작업을 조만간 다시 이어가려 합니다. 바로 동두천 지역을 포함한 미군 주둔지 주변 문화에대한 연구입니다. 동두천은 신중현 선생이 Add4라는 한국 최초의 로큰롤 그룹이 처음 결성했던 지역입니다. 미군부대가 몰려 있어서 재즈, 록큰롤, 디스코, 힙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국 대중음악이 유입되고, 시도되었던 곳이기도 하죠. 한국에서 전기악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1세대 록 음악인 다수가 거쳐간 동네이기도 하죠.

또한 당시 “백판”이라 불리던, 검열 결과 한국 발매가 금지되었던 음반의 불법적 생산은 물론, 미국에서 유입된 다양한 대중문화가 한국에서 불법, 비법, 탈법적으로 유통되었는 출발점이기도 했고요. 전기악기와 전기장치는 한국 음악을 어떻게 바꿨는지, 그 과정에서 한국 대중문화는 한국 밖을 어떻게 상상했고, 어떻게 교류했는지, 그 결과 어떤 문화적 감각을 갖게 되었는지 등으로 연구를 확장해 나가려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동두천을 찾았는데, 막상 지역을 연구하다보니 음악인 이외에도 미군 기지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다양한 소수자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대한 부분도 연구의 일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중과 가까이에서 소통하는 연구자, 교육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전부터 팟캐스트 같은 개인 미디어 채널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몇 년 전 '딴지영진공'이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했었는데 나름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경제학자, 심리학자, 인류학자와 영상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읽는 새롭고 다양한 시각을 이야기했는데, 그러한 내용도 대중과 충분히 소통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기회였습니다. 현재도 몇 개의 유튜브와 팟캐스트 프로그램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15년 넘게 ‘음악취향Y’라는 대중음악 웹진을 평론 및 연구자 동료들과 만들고 있기도 합니다. 언젠가 제가 학문적으로 좀 더 깊이를 갖게 된다면, 그 결과물 역시 이러한 눈높이 낮은 현대의 소통 채널을 통해 더 많은 대중과 나눠 보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