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추석, “삼대가 덕을 쌓아야 주말부부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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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환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책임연구원

얼마 전 추석이었다. 명절에 이런 시쳇말은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선조들 삶의 경험이 스쳐 있다. 그 실마리는 보잘 것 없고 세속적인 땅 문서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강릉 전주이씨 선교장


오늘날 강릉 전주이씨 선교장


강원도 강릉에는 선교장이 있다. 18세기 이후 전주이씨 삶의 터전이 되었던 선교장은 강릉의 대표적인 만석꾼이었다. 이것은 당대 한 인물이 성취 한 것이 아니라 삼대(三代)에 걸친 노력의 결실이었다. 단서는 500점이 넘는 땅문서 중 몇 건에 있다.


이내번은 충청도 충주에 세거하다 아버지를 여의자 어머니를 모시고 강릉에 들어왔다. 강릉은 이내번의 외가 고향이다. 외가 오죽헌 권씨의 재실에 살면서 가업을 이루었다.(선교장의 가계역사를 기록한 <가장> 내용 중에서)


선교장의 개척차로 이내번(1693∼1781)의 행적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1721년(경종 1) 충주를 떠나 어머니와 함께 강릉 외가에서 기거했다. 당시 불과 19세에 불과했으므로 어머니 안동권씨 부인(?∼1751)의 보살핌을 받았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이 강릉에서 아들을 굳건히 기르는 것이라 생각하고 아들에게 이곳에 정착해야 하는 절박함을 당부 했다. 이내번은 30세 이후 외가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했다. 이것이 그에게 부여된 사명이라 여겼다. 부모가 남긴 종자돈을 이용하여 땅을 샀다. 그는 습지여서 값이 싼 오늘날 선교장 일대의 땅을 매입했다. 그리고 나이 들어 선교장의 기초가 되는 조그만 기와집을 마련한 뒤, 자신과 후손들이 묻힐 선산을 마련 했다.


이내번이 삼척심씨 문중으로부터 땅을 사는 문서

바로 우리 문중이 심언광 대감의 시호를 요청하는 일로 여러 번 상경하는데, 여기에 필요한 경비가 아주 많다. 그런데 왕복할 재력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묘지 인근 논 10마지기를 동전 16냥 값으로 영원히 이내번에게 팔아버린다.

(1761년 이내번이 삼척심씨 문중으로부터 땅을 사는 문서 중에서)

이내번은 강릉의 세력가였던 삼척심씨로부터 16냥을 주고 산지 인근 논을 샀고, 이 일대에 선산을 조성했다. 그리고 아들 이시춘(1736∼1785)에게 자신이 일생동안 이룩한 가업을 계승할 임무를 넘겼다. 이시춘은 30세부터 아버지가 점지해 두었던 땅을 사 들이는 것은 물론 선교장을 증축 했다.

이시춘이 최우창으로부터 집과 땅을 사는 문서

내가 이사 때문에 집터가 딸린 밭 2섬지기와 초가집 12칸과 주변에 있는 유실수와 잡목 그리고 인근 산의 소나무를 모두 동전 230냥을 받고 이시춘에게 금년부터 영영 팔아버린다.

(1779년 이시춘이 최우창으로부터 집과 땅을 사는 문서 중에서)

이시춘은 230냥의 거금을 들여 땅 뿐만 아니라 집과 나무를 포함한 일체에 투자했다. 그는 강릉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낼 ‘랜드마크’를 확립하고 뿌듯했다. 삼대에 걸친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주역』에 “선을 많이 쌓은 집안은 나중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는 구절이 있다. 18세기 저명 학자 이재(1657∼1730)는 이 금언을 “조상의 음덕이 자손에게 끼치는 것”이라 해석했다. 강릉 선교장의 삼대, 그리고 우리 선조 모두 이 격언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동권씨 부인은 강릉 정착을 위한 씨앗을 뿌렸고, 이내번은 이를 받아 후손들이 자랄 수 있는 선교장의 터를 마련했다. 그리고 강릉에 온지 3대 60년 만에 이시춘이 비로소 그 과업을 완성함으로써 이들 삼대의 공업은 후손들에게 만석꾼이라는 부와 명예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오늘날 세대 간 갈등이 심하고, 추석과 같은 명절에 불안한 줄타기를 한다. 그래서 “삼대가 덕을 쌓아야 주말부부를 할 수 있다.”는 식의 가족 해체를 자조하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오늘의 내가 삼대에 걸친 덕업의 결과이고, 또 나의 적선이 자녀들에게 끼친다는 구조를 생각했다. 내가 바로 우리 가족 ‘새 역사의 창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절에 삼대(三代)를 생각한다면 세대 간의 긴장은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swan@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