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북으로 간 조선왕조실록

임선민 사진
임선빈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선임연구원

실록(實錄)은 한국․중국․베트남 등의 왕조에서 왕의 재위 기간 단위로 편찬된 당대사 역사 기록이다. 왕이 죽으면 후대 왕의 재위 초기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선대 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와 같은 실록의 편찬은 일찍이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부터 시작되었고, 당․송대에 이르면 실록의 체제나 찬수제도가 갖추어졌다. 현재 중국에는 『명실록』과 『청실록』 전질이 온전히 남아 있다. 베트남의 실록은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阮] 왕조시대에 전편 13권(1558~1777), 정편 489권(1802~1925), 총 502권에 달하는 『대남식록(大南寔錄)』이 편찬되어 현존한다. 우리나라의 실록 편찬은 고려왕조 초기부터 시작되었으나, 고려시대의 실록은 현존하지 않고, 조선왕조실록만 남아있다.


실록을 편찬한 3국은 실록의 보존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명나라의 경우 처음에는 실록을 2본 만들어 정본은 황제의 열람용으로 궁중에, 부본은 고금통집고(古今通集庫)[후에는 내각 즉 문연각(文淵閣)]에 보관했는데, 15세기에 궁궐에서 잦은 화재가 발생하자 가정 15년(1536)부터 전석(磚石)을 사용해 새로 지은 황사성(皇史宬)에 보관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에서도 『대남식록』의 편찬이 완료되면 권마다 원본 3부와 부본 3부, 총 6부로 인쇄하여 국사관의 땅방 드엉과 근정전, 동각 등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그런데 중국과 베트남의 사고(史庫)들은 모두 중앙에 설치되었고, 외사고(外史庫)는 없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경사고(京史庫) 외에 외사고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외사고의 설치는 고려 고종 14년(1227) 9월 『명종실록』 두 벌을 편찬하여 한 벌은 궁내 사관(史館)에 간직하고, 다른 한 벌은 해인사에 보관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후 고려후기의 외사고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창선도, 진도, 해인사, 선주[선산] 득익사, 보주[예천] 보문사, 충주 개천사, 죽주 칠장사 등으로 옮겼으며, 공양왕 2년(1390) 다시 충주 개천사로 옮겨 보관되었다. 개천사의 사고는 조선초기에 충주읍성 안으로 옮겨져 충주사고로 불리기 시작했다.


조선왕조도 처음 『태조실록』․『공정실록』․『태종실록』은 2본만 편찬하여 춘추관의 경사고와 충주의 외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1445년(세종 27)부터는 춘추관과 충주 외에 전주와 성주에도 외사고를 설치하여 네 곳에 분장하여 보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조선전기의 4사고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었다. 전주사고본 실록은 전쟁 중에 전주사고에서 내장산(은봉암⇢비래암⇢용굴암⇢비래암)/1년⇢ (1593년 7월)경기도 부평⇢ 강화도⇢ 해주⇢ 안주⇢ 영변 묘향산⇢ 강화도 등으로 2천여리를 옮겨다니면서 겨우 보존될 수 있었다.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나자 1606년(선조 39)에 다시 전주사고본을 토대로 3건을 인출하여 구건 1질과 신건 3질, 방본(초본) 1질을 재정비한 5사고에 보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외사고는 조선전기의 읍치사고(邑治史庫)와는 달리 강화도,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등의 깊은 산중(山中)에 설치했다.


조선후기 외사고 가운데 묘향산[향산(香山)] 사고에는 1606년에 새로 인출된 간행본 실록이 보관되었다. 임진전쟁 중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 실록이 한때 보관되기도 했던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사고에는 전주사고본 실록이 강화도로 옮겨진 후, 새로 간행한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의 13대 실록이 봉안되면서 사고로서의 기능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후금[후의 청]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안전지대인 남방으로 이건할 것이 논의되었으며, 1614년(광해군 6)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 사고가 건립되었다. 1618년 묘향산에 봉안되었던 『선조실록』이 적상산 사고에 이봉되어 봉안되기 시작했으며, 1634년(인조 12)에는 묘향산사고에 소장되어 있던 13대 실록과 기타 서적들도 모두 적상산사고로 이안되었다.

이후 적상산사고에는 『광해군일기』 정초본을 비롯하여 『인조실록』부터 25대 『철종실록』까지의 역대 실록들이 차례로 봉안되었다. 적상산사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은 일제강점기에 구황실문고로 옮겨 보관되었으나, 6·25 동란 중에 분실되었다. 이 적상산사고본 실록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 교수는 1960년 발표한 논문에서 적상산사고본의 행방에 대해 ‘구황실 소장 적상산본은 해방 직후 실록 도난사건이 발생하여 낙권이 많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6․25 사변 당시 이를 부산으로 소개(疏開)하였는데, 부산화재 당시 어떻게 되었는지 저간의 소식은 전연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1963년의 『역사과학』에서 적상산본의 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현재 이 적상산본 한 벌은 평양에 보관되고 있으며, 나머지 두벌(태백산 및 강화도 정족산본)은 서울에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의 혼란한 시기에 적상산사고본 실록은 부산으로 가지 않고 평양으로 운송된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군사작전을 하듯이 군용차량을 동원하여 평양까지 운반했다고 한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는 남북간의 교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남쪽에서는 적상산사고본 실록의 행방을 알 수 없었고, 이를 보유하고 있던 북쪽에서도 남한에 남아있던 다른 실록의 안위에 대해서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에는 적상산본 실록이 북한에 가 있음을 남쪽에서도 인지하게 된다. 사실 북한이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조선왕조실록을 완역하고, 1993년에 『리조실록』의 명칭으로 출판하였는데, 이 번역의 저본이 된 책이 6·25 때 분실된 적상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마 북으로 간 적상산본 조선왕조실록은 북한의 학문적 역량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다.


한편,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낙질본 실록 3책[『성종대왕실록』(K2-60) 『인조대왕실록』(K2-84) 『효종대왕실록』(K2-106)]은 북한에 가 있는 적상산본 실록의 일부로 추정된다. 주지하듯이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2019년 3월 그동안 국보지정에서 누락된 실록 96책 5건을 국보로 추가 지정했으며, 여기에는 장서각 소장 적상산사고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북한에 가 있다는 적상산본 실록은 우리의 국보지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북한의 적상산본 실록이 완질인지, 아니면 일부가 누락되어 있는지 여부도 확인되지 않는다. 특히 북한 소장 실록에 우리 장서각 소장의 낙질본[적상산본]이 비어 있는지 궁금하다. 앞으로 남북의 학술 교류를 통해 북한의 적상산본 실록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낙질본과의 비교 검토가 이루어진다면, 보다 완결성을 지닌 적상산사고본 실록이 갖추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랄 뿐이다.

sunby@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