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연 사람들

한국학자들이 더욱 많은 분야로 진출했으면 좋겠습니다. 국립산악박물관장 박종민

속초의 웅장한 설악산 전경, 진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곳에 산악사(山岳史)와 관련 자료들을 열람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 국립산악박물관 박종민 관장을 만나보았다.


박종민 사진

2016년 2월에 2대 국립산악박물관장으로 취임하셨어요. 국립산악박물관은 어떤 곳인가요?


2014년 11월에 개관하였습니다. 산악인들이 산림청에 박물관 건립을 제안함으로써 국립산악박물관이 세워졌습니다. 제안 당시 산악계 상황은 히말라야 14좌(8,000m 이상의 고산)를 등정한 산악인 5인을 보유하는 등 산악강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산악인들은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산악박물관 건립을 자신 있게 제안했다고 합니다. 박물관은 화채봉 – 대청봉 – 미시령 -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설악산 전경을 파노라마로 모두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크게 상설전시실(등반사와 산악인물, 산악문화), 기획전시실, 상설체험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획사업은 특별전과 기획 프로그램, 문화행사, 지역 문화행사 참여 등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장점은 3개의 상설체험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암벽체험실, 고산체험실, 산악교실입니다. 휴관일을 제외한 1일 7회 운영하고 있습니다. 암벽체험은 가장 인기 있는 체험프로그램입니다. 1년에 11만명이 국립산악박물관을 다녀가고, 체험학습만 45,000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국민에게 다가가는 국립산악박물관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사진

국립산악박물관 내부


많은 전시 및 체험·세미나를 기획하실텐데 미래에 꼭 해보고 싶은 사업이 있으신가요?


박물관사진

여러가지 체험·전시 및 세미나

2016년 2월, 제가 관장으로 올 당시 박물관에는 산악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았습니다. 전시자료를 준비하지 못해서 산악인으로부터 대여하여 전시할 정도로 상황이 열악하였습니다.

국가가 세운 박물관으로서 주요 산마다 개척 및 최초 등반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특별전을 개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산악인들에게 연락하였고, 수많은 산악행사에 참석하여 국립산악박물관을 알리고 세일즈 했습니다. 지금은 많은 관련 자료를 기증받았고, 기증을 예정한 산악인들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기획전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여 전시할 계획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존 수장고가 부족해서 부임 이후에 관장실을 줄여가면서 수장 공간을 확장하였습니다. 다행히도 내년에 산림청이 수장고 설계 예산을 반영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박물관은 문화복합공간으로서 체험과 교육 이외에 많은 문화행사도 열고 있습니다. 박물관 야외공간을 활용해서 1년에 수차례 공연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음악(재즈 등), 마술, 샌드 아트 등을 공연해서 속초 시민과 속초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업들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할 예정입니다.

박물관은 전시와 체험교육 이외 연구기능도 수행해야 합니다. 금년에는 산악연구자들의 《한국등반연구사》를 정리하려 합니다. 가을에는 산악연구 세미나 개최와 학술지를 발행할 예정입니다. 근현대등반사 1세기의 연구사를 되돌아보고, 해외 연구사례조사와 함께 산악연구 대상이 무엇인지도 고민할 생각입니다. 이미 필자와 발표자, 논평자를 선정했습니다. 우리 박물관은 금년을 산악연구 원년으로 삼고 있습니다.

요즈음 고용안정과 저비용 고효율의 박물관 운영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일자리 창출이 국정과제인데, 저는 ‘일거리 창출’을 하고 있습니다. 향후 10~30년 동안 일거리가 지속적으로 있으면, 직원들은 걱정 없이 박물관에서 근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용안정의 바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산 부족으로 박물관 고유사업을 비예산사업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작은 단위사업들을 묶어서 하나의 사업군을 만들고 그것을 축제화 하고 있습니다. 가시적인 사업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에도 많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저비용 고효율로 박물관을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시고 온양민속박물관, 순천향대학교를 거쳐 속초 국립산악박물관까지 오시면서 힘든 일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박종민 관장 사진

당시에는 어렵고 힘든 것으로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모든 게 다 변명인 것 같습니다. 대학원 박사 재학 시에는 온양민속박물관 학예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늘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대학원은 공통과목과 한문을 이수해야 해서 이수 학점이 다른 곳에 비해 많았습니다. 학기 중에는 이틀은 교과과정 이수를, 나머지 닷새는 박물관에서 근무하는 등 꽉 찬 일주일이 근무와 학업의 연속이었습니다. 나 개인을 위한 시간이 태부족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결국 저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온양과 부천에 근무할 때에 모두 청주에서 출퇴근하였습니다. 부천시박물관 재직 시에는 오창(청주)에서 KTX를 타고 부천까지 3년 간 출퇴근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힘이 들었고 어려움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몸이 힘들고 시간이 없다는 것이 그 때의 이유였지만, 지나고 보니 변명에 불과했다고 생각됩니다.

돌아가신 장철수(張哲秀) 교수님을 많이 생각했죠. 어느 날은 강의 중에 교수님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좋든지, 돈이 있든지 해야 한다. 나는 머리도 나쁘고 돈도 없고 해서 오기로 공부했다”고 하셨습니다. 오기는 피땀 어린 성실과 노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수님이 돌아가셨어도 매년 1월에는 빠짐없이 시흥의 산소를 다녀오곤 합니다. 교수님은 온양민속박물관에 저를 추천하여 박물관에 입문한 기회를 주셨던 분입니다. 온양민속박물관에 오시면 ‘박 군’ 하시면서 다른 분에게 “내 제자야. 박 군 인사드려” 하시며 저를 자랑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이어서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와 힘이 들 때는 항상 교수님의 명예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학대학원 교수님과 제자는 학위 이후에도 사제 간 관계와 정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뒤돌아보면 한국학대학원은 개인적으로 어떤 곳으로 느껴지시나요?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드니, 한국학대학원은 자연스럽게 ‘추억의 공간’으로 되었습니다. 그때는 물론 꿈의 공간, 학습공간이었겠죠. 타 전공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니 전공의 한계를 넘어 귀로 듣는 정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룹 스터디가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사회학과 정치학 전공 일부 학생들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강독한 적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한문과 제2외국어 등도 공부하였습니다.

학비와 기숙사비, 식비를 받지 않았으니, 가정경제가 넉넉하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희 때에는 기숙사 공동경비만 필요하였습니다. 당시 형편이 어려웠던 내게는 꿈의 학습공간이었습니다. 그때는 혜택을 받았으니, 이제는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다시 돌려주자’는 마음가짐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현재의 관장까지 오른 것 같습니다.


한국학과 민속학 관련 연구들이 국립산악박물관을 운영하시기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나요? 또 한국학자 및 관련 연구자들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박종민 관장 사진

제2전시실, 산악인물실

민속학은 현지 조사를 기본적으로 합니다. 현지 조사를 할 때는 마을 주민들과 상당히 긴밀한 유대감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최우선 작업입니다. 산악은 제게 너무 생소한 분야였습니다. 산악인들과 어울리는 것이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지난 3년 반을 뒤돌아보니, 딱히 어렵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젊은 시절부터 처음 뵙는 분들과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현지 조사 경험이 일정 부분 도움이 되었던 같습니다. 덕분에 저는 산악인들과 박물관을 연결해 주는 가교역할을 하며 산악사적으로 가치 있는 자료들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2017년도에는 1977년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8848 특별전’을 개최하였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당시 대원들은 자료들을 많이 갖고 계셨습니다. 직접 전화드려 찾아뵙고 사업을 설명하니, 이해하시고 자신들의 애장품을 기꺼이 기증하셨습니다. 우리 박물관은 특별전을 잘 치렀고 소중하고 귀한 자료들도 많이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차세대 한국학자들께 전하고 싶은 말은 관련 분야 기관에 많이 진출했으면 합니다. 꼭 학교에 남으려고만 하지 말고 자신의 연구 분야와 관련된 기관으로도 진출했으면 합니다. 학교에 계신 한국학 교수님들도 제자들에게 그런 길을 안내했으면 합니다. 경험적으로 보면 박물관에 근무하면서도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학문적 성취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한국학의 깊이 또한 중요하지만 넓은 곳에서 여러 사람과 접점을 만들어갈 때 그 가치가 더욱 빛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